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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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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면 재미있는 건가? 시간이 아깝지만 얼마 안 걸리니 그나마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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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책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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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낭만주의적 우울과 몽상이었다면, 아버지는 전근대적 수집벽과 망상증이었다. 그 밑바닥에 비교(秘敎)적 마을공동체의 전통이 있고 그 정점에 아방가르드적이고 카니발리즘적인 축제가 있는 것은 흥미로운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과 20세기 전반기 예술에 관한 목록들의 장황한 나열은 희한하게도 잘도 어울린다.
그러니까 20세기 문학의 뿌리에 전 시대의 패배한 기질들이 있음을 되새기는 일이란 얼마나 적절하고 쓸쓸하고 따뜻한 일인가.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복기하는 일, 즉 '아버지의 책'을 작가의 언어로 복기하는 일이 곧 문학이라는 것은 반박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다른 얘기지만,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도식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철없는 아버지와 꿈많은 어머니. 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러했고, 그러하지 않은가. 아니, 아니다. 생각을 고쳐먹기로 하자. 이건 어디까지나 유럽의 전후 자본주의에 의해 패배한 전시대의 유물들에 대한 기록이 아닌가. 정말이지 이런 역사적인 고증에는 무어라 토를 달기가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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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연인
우르스 비트머 지음, 이노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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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노숙한 문장이 중도에 읽기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 스위스의 교양있는 중산층의 가족사는 지금 여기에서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사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소설에서도 반복되는 말이지만, 어머니의 '기질'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어머니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어떤 기질; " 어쩌면 그녀의 기질이라는 건, 그녀가 종종 시선을 내면으로 향한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릿속의 고열을 느끼면서 방 한구석에 굳어진 채로 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 그럴 때 그녀의 내부에서는 충만한 광채와 빛의 세계가 펼쳐졌다." 전 시대의 낭만주의적 우울 또는 열정과도 같은 그 기질은 그러나 전쟁을 겪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는 한 예술가-사업가 부르주아와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의해 좌절당하고 억압당한다; "이제 그녀의 기질이라는 것은 정확히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었다. 정상적이 되는 것. (...)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덥고 추운 것도 느끼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기질은 항상 건강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든두 해 만에 자신의 생을 견디기를 포기한다 - 세상에, 여든두 해라니.

나는 전 시대 유럽의 우울과 열정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것이 왜 20세기에 들어 일종의 여성적 정신질환으로 여겨져야 했는지도 알지 못하고, 실은 (상관없지만) 그 패배와 몰락이 조금 불만이기도 하다. 조금 다른 문제지만, 유럽의 정신질환을 2차대전이라는 트라우마로 수렴시키는 방식은 조금 안이하지 않은가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연인>은 그렇게 해석하지도, 그렇게 해석되도록 쓰고 있지도 않다. 다만 따뜻하고 씁쓸하게만, 주마등처럼 후루룩 그 장면들을 반추할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의 기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가 노숙한 작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단은 후자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원래 노작가는 모든 지나간 것들에 대해 말함으로써 모든 것을 지나가버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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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사샤 스타니시치 지음, 정지인 옮김 / 낭기열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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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이 오래 두고 읽었지만 그 시간과 그 동안의 조바심이 아깝지 않다. 번역도 좋고 뭐 다 좋다.

-그러니까 하늘이 내리는 천생의 이야기꾼이란 아주 희소한 확률로, 랜덤하게 어떤 때 어떤 장소를 골라 태어나게 되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1978년의 보스니아의 비셰그라드라니, 이런 얄궂은 일이 또 있을까. 이런 보석 같은 문장과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지닌 인간이 같은 시대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우린 어떤 문장과 이야기들을 볼 수 있었을까.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런 의문을 품게 한다. 전쟁과 이산 이후에 강이 더이상 서사(시)도 서정(시)도 될 수 없다면, 그러면 전쟁과 이산 이후에 강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더이상 강물로 흐르지 않고 포탄의 파편처럼 흩어지게 된 이후에는.

"할아버지라면 이렇게 말하셨겠죠. 좋은 이야기란 우리 드리나와 같은 이야기란다. 드리나는 결코 잔잔하게 졸졸 흐르는 강이 아니야. 드리나는 격렬하고, 광활하고, 지류들이 흘러들어 더욱 풍요로워지고, 강둑 위로 넘쳐흐르고 콸콸 솟아 흐르며 거친 물소리를 내고, 때때로 얕아지기도 하지만, 강은 곧 다시 급류가 되고 출렁거림이 없는 심연의 서막을 여는 것이란다. 할아버지, 그런데 한 가지, 드리나도 이야기도 둘 다 할 수 없는 게 있어요. 그 둘에게는 되돌아감이 없죠. 물은 거꾸로 거슬러 흐르지 않고, 다른 강바닥을 선택하지 않아요. 지금 아무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그러니까 이제, 흘러가고 흩어진 파편들을 흘러가고 흩어진 채로 애도하고 기리는 것 외에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지 않은 걸까. 그런데 그런 애도는 어쩌자고 이렇게 아름다운 걸까.

-그 아름다움은, 뜬금없지만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게 한다. 포탄이 터지고, 놀라 웅크린 아이의 등에 유리창 파편들이 무수하게 박힌다. 아이는 놀랐기 때문에, 아이이기 때문에 등에서 흐르는 피를 알지 못한다. 등에 박힌 유리 파편만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난다. 아름답게, 그러니까 보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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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거실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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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줄거리를 정돈해서 이해할 수 있는 몇 안될 사람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마구 이야기하고 다닐 얼마간의 사람에 속할 수 있는 것은 기쁘기 그지없다. 배수아의 소설이 나아가는 곳은 매번 내 범속한 기대를 어느정도 뛰어넘는다. 그래서 놀라움과 기쁨과 일종의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래서 좋다. 특히 문장들이, 나뭇잎이 숲을 대변하듯 소설 전체를 대변하는 문장들이, 어떨 때 꿈속에서 보았던 문장들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부끄러운 생각마저 하게 만드는 저 문장들이. 어떤 대목에서, 어떤 대목이라도 상관없지만, 이것이 누구의 독백인지 누구를 향한 독백인지 한참을 놓쳐버리고도 문득 저도 모르게 소스라치게 되는 문장들이. (그의 문장들이 반듯한 우리말이 아니지 않느냐는 왈가왈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슬프다.) 『북쪽 거실』은, 소설  스스로 어느 지점에서부터 공언하듯, 소설이 꾸는 꿈이다. 비슷하게 말해, 배수아의 『북쪽 거실』은 지금의 한국어가 꿀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꿈이다. 과장을 섞자면, 당장 죽기 전에 책 한 권만 정독할 수 있는 시간만이 주어진다면, 나는 단연 『북쪽 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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