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 호라티우스 시학.플라톤 시론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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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는 늘 말한다. 시인은 신과의 대화를 하는 지상의 천사라고 말이다. 또 다른 선배는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자신의 육체를 갉아먹는 고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후배들에게 아직도 시인으로서의 자질과 시를 쓰는 스킬을 가르치기 위해서 미술사와 비평 책들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밤새 그 책들을 읽고 생각해서 그들과 함께 그 힘든 길을 가자고 타이르고 설득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늘 미안한 생각이 든다. 먼저 문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접해야하고 접해 보았을 만한 책을 고르는 일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가끔씩 외진 자리에 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그때마다 지나치듯 [시학]을 읽는다. 이미 어느 정도 접어버린 시 쓰기를 아쉬워하면서......

[시학]은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라고 생각한다. 시학에서 문학의 본질은 모방에 있다고 하지만 나는 이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모방을 새롭게 각색해 본다면 최대한 현실과 가까이 대상을 그려내라. 그리고 나서 가치관을 주입하여 그 모방이 단순한 모방이 되게 하지 말라. 가장 기본이 되는 말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라면 식상하기까지 한 말들이지만 의도적인 모방은 자칫 화가 되지 않겠나. (물론 모방설에서 의미하는 그 뜻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다.) 그 모티브는 비슷할 수 있지만 패러디의 한계를 넘어야할 필요성에서 진정한 창작의 기쁨을 맛보지 않을까?

플롯은 간단하게 ‘줄거리’라고 하기도 한다. 이야기가 시간적 경과에 의한 줄거리의 전개를 뜻하는 것이라면 플롯은 작품의 주제를 증명하는 데 관련된 등장인물 등의 내적(內的) 인과관계를 추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플롯을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 이래 작품의 ‘묘사’에 선행하는 극적 효과의 중요한 지주(支柱)로 삼아왔다. 간단히 말해서 이야기와 플롯은 엄격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는 이야기와 플롯의 차이점을 수 없이 강조하면서도 혼돈하기도 하니 참 뉘앙스가 다른데도 그 내용의 뉘앙스가 혼란을 가져오는 것 보면 아이러니컬한 것이 사실이다.

소설을 쓰는 후배들에게 늘 강조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경우가 아닌가? 아무튼 [시학]에서 말하는 플롯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작품의 전략과 전술이 얼마나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그 글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고 전략화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듯, 이야기는 시간적 경과를 이끌어 가는 단순형이지만 플롯은 이야기 속에서 갈등구조 존재하고 있는 복합형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본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모방설과 플롯 그리고 비극과 카타르시스가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볼만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물론 전적으로 이 책에 대해서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름대로 판단 기준을 가지고 비판해 볼 필요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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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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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극장에서 촉망받던 젊은 시인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가 남긴 것은 단 한 권의 시집 뿐이다. [입 속의 검은 잎]

작품 평을 할 때마다 늘 느끼는 불안감이라고 할까? 어설픈 해석과 논리로 평한다는 것은 상당한 두려움을 수반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스로 그러한 활동마저 멈춰버린다면 그 또한 나 자신을 나태하게 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화자는 늘 유년시절의 소년이거나 청년으로 등장한다. 안개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존재다. 그러나 안개는 우리를 은폐해 주는 매개체이다. 부끄러움과 죄로부터....... 은폐되어진다는 것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이유로 습관이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 사람들은 쉽게 동화되기 쉬우니까.

[진눈깨비]-적어도 눈은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든다. 그래서 이 시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인 문구를 인용해 본다.-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현실은 뭔가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구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적어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 그것이 외로움이거나 상실감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의 작품 속에는 모호한 표현들이 자주 나타난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경험의 공유란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하는가? 유년시절 우리는 누구나 엄마를 기다린다. 아이는 늘 엄마를 향해서 달려가지만 대상은 늘 어딘가에 가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난은 더욱 애틋하고 가련한 추억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엄마걱정]을 읽을 때마다 신경이 애민해지고 배추잎사귀처럼 조용히 숙제가 끝날 때쯤 엄마가 돌아와 주었으면 하는 소년의 그 순수함. 그렇지 않은가? 기다림만큼 힘들고 지루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 일이 끝나기 두려워 천천히 연필에 침을 바르며 숙제를 하는 아이의 모습, 시인은 가수이면서 화가여야 한다면 이 작품만큼 잘 그린 그림도 있을까? 이 아련한 기억들로부터 성장을 멈춰버리는 아니 두려워하는 소년,[바람의 집-겨울 판화1]의 내용에서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기형도의 주 소재는 가난, 유년시절의 그리움, 가족사의 애환, 외로움, 그리고 주변인으로서의 아픔을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우리는 추억만으로도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아주 오래 전에는 아, 이렇게 따뜻한 소재의 글을 쓰는 작가라니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면서 작가의 시가 왜 그렇게 가슴 아프고 쓸쓸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문득 나도 나이가 먹어 가는 것을 느끼는 것인가 보다. 그래서 그의 시를 멀리하려 참 무던히도 노력을 했다. 그렇다. 그는 무던히도 외로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빨리 이 세상과 인사를 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싶었는지도, 아무튼 소년은 소년으로 그 자리에서 늘 힘겹게 가족들의 힘겨운 생활을 지켜보면서 성장을 멈추어 버렸다. 기형도가 키워야할 소년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은 채 그의 작품 속에서 영원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 조치원중의 한 연을 끝으로 글을 마칠까 한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
조치원까지 사내는 말이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마지막 귀향은
이것이 몇 번째일까, 나는 고개를 흔든다.
나의 졸음은 질 나쁜 성냥처럼 금방 꺼져버린다.
설령 사내를 며칠 후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한들 어떠랴. 누구에게나 겨울을 위하여
한 개쯤의 외투는 갖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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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외 - 한국소설문학대계 45
김승옥 지음 / 동아출판사(두산)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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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한 작가에게 그 이유를 묻기란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만큼 사정이 있었겠지. 참 잘 쓴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이런 일화를 들려주었다. 한때 정말 인기가 있을 때에는 여관에 감금당하고 글을 썼다고 한다. 아마 그때 질려버린 것은 아닐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제3세대 문학(삼성출판사)에서였다. 생일 선물로 누나가 사준 세계문학 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이었다. 그때 이문열씨가 가장 막내였으니까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리고 그 책들을 정신없이 읽었다. 그리고.......이공계열을 선택하고 5년 후 다시 국문과를 선택했으니 참 소장한 책들도 세월만큼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김승옥 작가를 만났던 기억이 있다. 용기를 내어 이것저것 묻던 초자의 용기라니. 그때 절필의 이유를 물어 보았는지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정말 아주 정말 중년의 신사였다고나 할까? 대단히 깔끔한 인상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이곳의 명물은 안개다. 안개가 끼면 한 치 앞을 바라보지 못할 만큼 지독하게 안개가 두터운 곳이다. 때로는 익명으로 살아가고 싶은 도시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안개는 나 자신의 모습을 베일 속으로 감추어주는 커튼 같은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안개 中-

그리고 수많은 도시인들은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구토를 하면서도 얼마나 그것에 대한 애착과 탐욕이 많은가? 화자는 도시인이다. 정말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허수아비 같은 가장이다. 그렇지만 이곳에 오면 나는 나 자신을 안개 속에 감출 수 있다. 정말 익명의 섬으로 떠나온 익명의 사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주관적이지 못한 자아의 정체성 상실은 화자의 현실도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독자인 내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도입 부분이다. 작가는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가기 위해서 막연하게 어디론가 떠난다. 이러한 도입 부분은 김승옥 이후로 자주 사용한 것이다. 윤대녕(정말 깍 마르고 신경질적일 것 같은 작가, 첫 느낌)의 작품을 보면 그 구성이 흡사함을 많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은어낚시 통신, 아니면 이상문학상 수상집 중에 있을 것임) 그래서 우리는 이를 두고 김승옥 패턴이라고 명명하곤 했다.

정말 지독한 안개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섬으로 낯선 사내가 들어선다. 안개는 나의 죄와 부끄러움을 감추어 주는 효과장치이기도 하다. 무진기행을 읽어 보도록하라. 당신은 안개 속에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개가 걷히면 모든 것은 그 자리에 있다. 단지 순간적인 눈가림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할 것이다. 안개는 이곳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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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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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는 광적인 집착으로 스킬을 연마한다. 어느 날 고흐가 귀를 잘랐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잔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발전하고 있다.) 에밀레종에는 아이의 영혼이 숨쉬고 있어서 아름다운 종소리가 난다. 기막힌 자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인육을 사용하는 어느 중국요리 집이 인기가 있다. 프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향수를 읽으면서 이런 어구들이 자주 생각났다. 때로는 집착이란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만드는가? 나는 그루누이, 최고의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아름다운 여체를 탐닉하고, 어린 육체를 향수의 재료로 사용한답니다. 우리의 고뇌는 이 도덕적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목표로 하는 최고의 길은 그만큼 자아와 끊임없는 투쟁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슬픈 자아인 것이다. 그루누이 그대의 고뇌하는 밤과 도덕적 갈등에서 나는 또 한 번 그대의 운명을 불쌍히 여긴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순간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안주하면 어떨까? 라는, 차라리 안주하면서 그 위치에서 만족이란 없을까? 스스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부정하고 아니 자주 프로정신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았는가?

그래서 향수는 나에게 심취와 집착의 차이점과 동일함을 가르쳤다. 심취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느 한 곳에 집중한다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문제를 가지고 다가설 여지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해서 아주 집중한다는 것이다. 집착은 또 어떤가? 부정적인 심취를 말하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말이다.

버버리, 샤넬, 켈빈 클라인, 폴로등등 향수는 때로는 신선하면서 자극적인 향을 가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감정이 이상한 기류를 형성한다. 그만큼 민감해지는 이유는 뭘까? 향수는 그만큼 우리의 감각을 자극한다. 아주 매혹적으로 말이다. 향수는 쥐스킨트의 소설을 탐닉하고 가장 늦게 읽었던 책이었다. 구성상, 내용상의 커다란 충격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으나 인간은 자신의 일로 인하여(집착으로 인하여) 너무도 쉽게 주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엔 도덕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그루누이의 열정을 사랑하는 것이지 그의 집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위대한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 인간은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고뇌의 강을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마침내 그 강에 발을 담그는 자는 영원히 그 마력과 흥분의 도가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되돌아서는 자의 고뇌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평범한 천재로 전락되어 가는 것이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운명이기를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내가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분명 아니지만 한 번 프로의 길로 들어서면 우리는 끝없이 갈등의 길을 걷게 된다. 자아를 자학하면서 말이다. 그루누이의 인간적 갈등을 꼼꼼하게 파헤치면서 그가 갖는 심리적 상황변화의 설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가 독서를 계속하고 심취하는 향수의 묘미가 아닐까?

그리고 그루누이는 마지막 작업을 시작한다. 아주 아름답고 어린 소녀를 병 속에 담아 내는 일을 말이다. 고뇌하면서 그리고 묘한 성취의 웃음을 흘리면서 자신을 조여오는 수사망을 느끼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세간에 광적인 집착을 한 향수 제조 기술자의 살인 경위가 대문작 만하게 신문을 장악한다. 내가 구독하는 신문에 사내는 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나쁜 놈) 나는 가볍게 신문을 넘긴다. 또 살인이군......우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찾아서 향수의 책장을 넘길 것이다. -그루누이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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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삼촌 - 창비소설집
현기영 지음 / 창비 / 197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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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우리는 현기영씨를 모신 적이 있다. 그를 지칭할 때는 늘 제주도 작가 그리고 순이삼촌의 작가로 불리었다. 그러나 내가 접한 그는 머리가 약간 벗어지고 동네 아저씨 같은 다정한 인상이었다. 그날 그는 너무 많은 술을 마시고 우리가 모시는 여관에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인상, 그리고 쉽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버리는 개방된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국방부에서 미군이 용산에 아파트를 짓는 것을 허락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문제는 이것에서도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정권은 어딘가 정당성이 부재한 것에서 출발을 했다고 본다. 또한, 역사적인 반성 없이 지나쳐 온 오류의 결과라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의 근대역사는 주변인의 변주를 서성거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짓눌린 역사를 살아왔다고 해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역사는 사장되어버리는 아픔을 안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잘못되어진 역사를 파헤치고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현실이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과 오해를 풀어헤치고 현 세대와 공감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순이 삼촌으로 가는 맨 처음 정거장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역사가 일제시대의 변질을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온 것은 4.3과 여. 순 반란, 4.13부정선거, 5.16쿠테타, 그리고 80년 광주민주화항쟁, 6.29선언, 새 정권(구체적으로 여, 야의 정권 교체)창출까지 역사를 거스린 과정은 이만큼 긴 세월동안 그리고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의 아픔이 반복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문학은 사회의 가치관이나 통념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고서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만큼 문학은 민중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이 사람을 학살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민중을 배반한 살상은 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정설 아닌가? 어떤 시선에서 정당화되고 있는가? 친일을 했던 기득권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정권이 탄생하고 그러면서 이념의 반대편을 무참히 학살하고 게다가 이념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의 무참한 살상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구체적인 역사의 정리를 해 본적이 있었던가? 오해와 갈등만이 내재되어 온 역사 그리고 제주도 사람들을 변방 인으로 간주해버린 역사의 왜곡은 현재까지도 큰 슬픔을 안고 있다. 사람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마을 전체 사람을 구덩이 속에 총살해 버린다니 미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한 번도 그 진실에 대해서 파헤친 적이 있었던가? 묵과해버리고 지나쳐버린 적이 너무도 많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한 번 잘못 들여놓고 시작한 근대역사의 시작은 바로 상처의 역사로 귀결되어진 것이 아닌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하나로 소리내지 못하는 것은 아픔과 잘못에 대해서 구체적 반성 없이 지나쳐 와 버린 실수를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이 삼촌은 비단 제주도 사람들의 아픔만이 아니다. 우리역사의 아픔이고 현재까지 유전되어 오는 짐인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당당하게도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서 건축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우리의 역사 또한 넘기 힘든 장벽을 짓고있다. 역사는 반성과 정리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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