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 삼촌 - 창비소설집
현기영 지음 / 창비 / 1979년 11월
평점 :
절판


대학 다닐 때 우리는 현기영씨를 모신 적이 있다. 그를 지칭할 때는 늘 제주도 작가 그리고 순이삼촌의 작가로 불리었다. 그러나 내가 접한 그는 머리가 약간 벗어지고 동네 아저씨 같은 다정한 인상이었다. 그날 그는 너무 많은 술을 마시고 우리가 모시는 여관에서 잠을 청했던 기억이 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인상, 그리고 쉽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버리는 개방된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얼마 전 국방부에서 미군이 용산에 아파트를 짓는 것을 허락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문제는 이것에서도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정권은 어딘가 정당성이 부재한 것에서 출발을 했다고 본다. 또한, 역사적인 반성 없이 지나쳐 온 오류의 결과라고 보면 될 것이다.

우리의 근대역사는 주변인의 변주를 서성거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짓눌린 역사를 살아왔다고 해서 모두가 침묵한다면 역사는 사장되어버리는 아픔을 안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그러나 잘못되어진 역사를 파헤치고 진실을 규명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현실이다. 역사는 반드시 진실과 오해를 풀어헤치고 현 세대와 공감하고 화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순이 삼촌으로 가는 맨 처음 정거장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역사가 일제시대의 변질을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온 것은 4.3과 여. 순 반란, 4.13부정선거, 5.16쿠테타, 그리고 80년 광주민주화항쟁, 6.29선언, 새 정권(구체적으로 여, 야의 정권 교체)창출까지 역사를 거스린 과정은 이만큼 긴 세월동안 그리고 민중의 끊임없는 투쟁의 아픔이 반복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문학은 사회의 가치관이나 통념 그리고 진실을 외면하고서 올바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만큼 문학은 민중을 깨우치는 종소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이 사람을 학살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민중을 배반한 살상은 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정설 아닌가? 어떤 시선에서 정당화되고 있는가? 친일을 했던 기득권의 권력이 그대로 유지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정권이 탄생하고 그러면서 이념의 반대편을 무참히 학살하고 게다가 이념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의 무참한 살상은 어떤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구체적인 역사의 정리를 해 본적이 있었던가? 오해와 갈등만이 내재되어 온 역사 그리고 제주도 사람들을 변방 인으로 간주해버린 역사의 왜곡은 현재까지도 큰 슬픔을 안고 있다. 사람이란 얼마나 잔인한가? 마을 전체 사람을 구덩이 속에 총살해 버린다니 미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면서도 한 번도 그 진실에 대해서 파헤친 적이 있었던가? 묵과해버리고 지나쳐버린 적이 너무도 많은 우리 근대사의 아픔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되어지는지 너무도 잘 알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한 번 잘못 들여놓고 시작한 근대역사의 시작은 바로 상처의 역사로 귀결되어진 것이 아닌가? 과거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의 목소리를 하나로 소리내지 못하는 것은 아픔과 잘못에 대해서 구체적 반성 없이 지나쳐 와 버린 실수를 반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순이 삼촌은 비단 제주도 사람들의 아픔만이 아니다. 우리역사의 아픔이고 현재까지 유전되어 오는 짐인 것이다. 그리고 미군이 당당하게도 국방부의 승인을 얻어서 건축허가를 받았다고 한다. 씁쓸한 기분이 든다. 우리의 역사 또한 넘기 힘든 장벽을 짓고있다. 역사는 반성과 정리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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