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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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는 평균 연령이 일흔여덟 살인 산골 수평마을에 서울에서 온 성진과 혜진이 정착하면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이름 끝의 "진"을 따서 마을 사람들에게 "찌니들"이라고 불린다. 처음에는 그저 도시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었지만,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호기심 어린 시선은 경계와 수군거림으로 바뀌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성진과 혜진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정체성으로 먼저 인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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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찌니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무례한 질문을 던지고 자기들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며, 급기야 마을에서 내쫓으려 한다. 세상의 날 선 시선을 피해 이곳까지 흘러온 두 사람은 결국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그들의 등장은 보수적인 농촌 공동체에 하나의 경보처럼 울려 퍼지고, 그렇게 평온하던 마을에 "찌니주의보"가 내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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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갈등을 단순한 대립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찌니들을 쫓아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고 수군거리면서도, 정작 두 사람의 대문 문고리에는 시래깃국과 가지나물을 슬며시 걸어둔다. 낯 뜨거운 질문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다가도 돌아서서는 갓 부친 호박전을 손에 쥐여주는 할매들의 모습은 모순적이면서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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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베트남에서 시집와 20년 동안 이방인으로 살아온 이주 여성 "쑤언"의 존재가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라며 거침없이 찌니들의 편에 서는 쑤언은 누구보다 낯선 존재로 살아가는 감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촌로들의 편견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그녀의 말은 더욱 통쾌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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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지 않는다. 대신 함께 밥을 먹고, 일을 돕고, 다투고,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 그렇게 일상을 거듭하는 동안 "낯선 사람"은 "아는 사람"이 되고, 어느새 "우리 동네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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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관계의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의 관계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부모와 자식도, 이웃과 동료도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수평마을 사람들 역시 찌니들의 성적 지향을 온전히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웃"이기에 위기의 순간 손을 내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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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찌니"라는 이름은 두 사람을 낯선 존재로 구분하고 밀어내는 말이었지만 밥을 나누고 부대끼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 이름은 점차 "우리 마을 사람"이라는 관계의 이름으로 변해간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생각이 달라도, 밥 한 끼를 나누고 위기의 순간 손을 내밀 수 있다. 그것이 작가가 그려낸 공동체의 모습이자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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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완벽한 선인도, 완벽한 악인도 없다. 모두 조금씩 이상하고 이기적이며, 저마다의 사정과 이유를 품고 살아간다. 그렇게 싸우고 흉보고 밥을 나눠 먹는 동안 어느새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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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밥 한 끼를 건네고, 곤경에 빠졌을 때 손을 내밀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함께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찌니주의보>는 결국 이해보다 먼저 다가오는 마음과, 그렇게 조금씩 서로의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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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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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로 풀어라." "소통이 부족하다." 일상에서 흔히 듣고 내뱉는 말이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앞에서 진이 빠져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충분히 설명하면 언젠가는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대화에 실패하면 먼저 자신의 말하는 방식을 되돌아본다. 내가 표현을 잘못했나,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했어야 했나,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나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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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는 이 지긋지긋한 자책의 굴레를 끊어낸다. 저자가 내놓은 답은 명쾌하다. "우리는 애초에 대화할 수 없다."





책은 소통의 불가능성이 개인의 무능이나 성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라고 진단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82억 개의 고유한 몸은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게다가 젠더, 계급, 나이 등에 따라 각자가 놓인 사회적 위치가 다르고, 그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권력의 위계가 작동한다. 서로 다른 세계에 서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완벽하게 공감하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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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간절히 소통을 원하는가." 누구나 이해받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존재와 고통을 끊임없이 설명해야 하는 쪽은 대개 약자다. 가부장제 사회의 기득권 남성이나 인종차별 사회의 백인은 소통을 위해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 이미 사회의 규칙과 주류 언어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약자는 권력자의 언어로 자신의 삶을 번역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상대를 설득해야 한다. 이처럼 소통의 부담이 한쪽에 치우친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소통은 선(善)"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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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말이 통하지 않는 이 팍팍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책이 제안하는 것은 더 뛰어난 대화 기술이 아니다. 침묵하거나 대답하지 않을 권리, 완벽한 합의 대신 가능한 중간 지점을 찾는 태도, 상대를 끝까지 설득하지 않을 선택, 필요하다면 대화를 끝낼 권리다. 모두와 반드시 소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누구와 얼마나 이야기할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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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눴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생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상대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고 표현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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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처럼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가능하다는 현대 사회의 오랜 환상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소통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오히려 마음은 한결 편안해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설득하느라 자신을 소진하는 대신, 자신과 자신의 언어를 돌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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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다름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견디는 일이다. 대화의 목적 역시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무조건적인 합의를 끌어내는 데 있지 않다. 서로 엇갈리는 대화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벼려 "나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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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삶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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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삶>은 어린 시절 갑자기 가족을 떠난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주인공 스티븐은 열한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죽음으로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아무런 설명도 없이 아버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부재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스티븐의 마음 한편에 남아 그리움과 원망,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그림자가 된다.


"있잖아, 어떤 사람은 우리 삶에 잠시 들어왔다가," 어머니가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고, 물위에 햇빛이 반짝였다. "그냥 그렇게—" 어머니는 머리 위로 손을 거칠게 내저었다. "그냥 그렇게, 사라지는 거야."

146쪽



어머니가 했던 이 말처럼 누군가는 삶에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 그 부재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스티븐에게 아버지의 실종은 어린 시절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의 삶과 인간관계까지 끊임없이 흔드는 기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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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 접어든 스티븐은 자신의 삶마저 흔들리기 시작하자 오랫동안 외면해온 아버지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일기장과 아버지가 남긴 편지와 메모를 읽고, 당시 아버지와 가까웠던 친구와 동료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아버지의 모습은 모두 조금씩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다정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긴 사람이다. 아버지를 알아갈수록 오히려 그는 더욱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로 변해간다.




스티븐은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아버지 사이의 간극에서 혼란을 느낀다. 한 사람의 삶은 결코 하나의 이야기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구와 함께했는지, 어떤 순간을 바라보았는지에 따라 같은 사람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된다. 결국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조차 수많은 모습 가운데 일부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부재는 스티븐의 현재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은 채 살아간다. 동시에 자신 역시 아버지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는 사람이 될까 두려워한다. 가까운 사람에게 갑자기 거리를 두고 관계에서 물러나려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평생 닮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와 어느새 비슷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과거의 상처는 이미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관계와 선택까지 끊임없이 흔드는 기억으로 남는다.



상상 속의 삶에서는 모든 것이 다르다.

얼마 후 나는 일어나서 복도를 지나 부모님 침실로 다가갔다. 문밖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거기에 있으니 행복했다는 것만은 안다.

나는 그렇게 방 바깥의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웃음소리를, 그들이 아직 그 안에 있다는 기색을, 한때 내가 알! 삶이 언젠가는 정상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조짐을 찾아 귀를 기울였다.

421쪽


제목인 <상상 속의 삶> 역시 이러한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 어린 스티븐은 사라진 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또 다른 삶을 상상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조차 실제의 모습인지,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이 있으며, 기억 속의 사람과 실제의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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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공식적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때를 끝으로 아버지가 실존한다는 증거―전화번호, 영구 거주지, 심지어 차에 대한 기록까지—는 전부 사라지지만, 당시 나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내 삶에서 어떤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변했다는 것,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

396쪽


앤드루 포터의 문장은 큰 감정을 소리 높여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지나간 장면과 사소한 기억을 차분하게 꺼내놓으며 상실의 감정을 조금씩 쌓아간다. 절제된 문장 탓에 오히려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무게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스티븐의 여정은 결국 모든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이 아니라, 끝내 알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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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서재 책상 앞 벽에 프루스트의 다음 구절을 적은작은 쪽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진정한 낙원은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이다.

나는 언제나 이 구절을 어머니와 나에게 남긴 사과라고, 자신이 우리를 저버렸음을 인정하는 글이라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것을 완전히 다른 의미로 남겼을 가능성도 있다. 

423쪽


아버지가 남긴 이 문장은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더욱 오래 남는다. 지나간 시간은 기억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잃어버린 것은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기도 한다. 스티븐이 평생 붙들고 있던 아버지 역시 어쩌면 실제의 아버지인 동시에 그가 기억과 상상으로 만들어낸 아버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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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라진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이면서 결국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사랑했던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과거의 모든 질문에 답을 얻지 못해도 삶은 계속된다. 지나간 사람과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품은 채 현재의 사람들에게로 걸어가는 것. 마지막에 스티븐이 자신의 가족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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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올리브 ㅣ Untold Originals (언톨드 오리지널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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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의 온실>과 <파견자들>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온 김초엽 작가가 3년 만에 장편소설 <태양 아래 올리브>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은 믿음과 의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따라 질주하는 SF 로드무비다!! 




소설은 신앙과 과학처럼 쉽게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세계의 충돌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수녀와 과학 유튜버가 동행하는 "버디 로드무비"라는 흥미롭고 경쾌한 형식을 더했다. 전작에서 인간의 조건과 낯선 존재와의 공존을 탐구해 온 작가는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소설의 배경은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된 근미래다. 최고기온이 40도를 훌쩍 넘어서고 한국에서도 은백색 올리브나무가 자라나는 기이한 시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재난 현장을 누비며 헌신적으로 타인을 돕는 "푸른아녜스 수녀회"의 수녀 이레와 과학기술 정책 매거진의 에디터이자 익명 과학 채널 "미놋"을 운영하는 솔민이 있다. 이레가 맹목적으로 보일 만큼 타인을 돕는 인물이라면, 솔민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과학의 이름으로 맹신과 허위를 집요하게 파헤치는 인물이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은 한때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였지만,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헤어졌다. 그러나 8년 뒤 이레의 과거와 얽힌 수상한 사건을 계기로 재회해 함께 길을 떠난다. 한국에서 시작된 여정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거쳐 메콩강과 태국 북부까지 이어진다. 미행과 도주가 거듭되는 가운데 감춰져 있던 단서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차 속도를 높인다.


기후 변화로 원래 자라지 않던 곳에 뿌리를 내린 올리브를 보며 이레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자란 올리브"를 떠올린다. 그러나 태어난 장소나 존재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존재에게 과연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무는 제 자리를 선택한 적이 없다. 이미 그곳에 뿌리를 내렸고,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갈 뿐이다. 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레와 준의 존재를 거쳐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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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 소설이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끝까지 질문을 이어간다는 데 있다. 타인의 마음과 고통은 완벽하게 증명할 수도,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 해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존재를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 <태양 아래 올리브>는 바로 그 선택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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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정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모든 의문을 말끔히 해소하는 진상이 아니다. 의식은 자신을 이루는 물질에서 벗어날 수 없고 시간을 뛰어넘을 수도 없다. 먼 미래에 도달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쌓인 기억과 감각 역시 그대로 복제할 수 없다. 그래서 "생은 단 한 번뿐인 연산이다"라는 문장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결국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완벽하게 증명된 영혼이 아니라, 느끼고 기억하며 고통받는 한 존재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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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믿기로 선택하는 것. 이 소설에서 믿음은 불확실한 것을 사실로 단정하는 태도라기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로 하는 선택에 가깝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의 곁에 남을 수 있는가. 결국 <태양 아래 올리브>가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여기에 닿는다. 주제는 묵직하지만 그 질문을 따라가는 독서의 리듬은 끝까지 경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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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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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만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이제는 한 권 한 권이 전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투명한 나선>도 조금 천천히, 아껴 읽는 마음으로 읽었다.



오랫동안 읽어 온 작가인 만큼 그의 소설에서 반복되어 온 질문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이 되는 걸까. 혈연으로 이어져 있어도 서로에게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무런 혈연이 없어도 서로를 지키며 가족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서 히가시노 게이고가 꾸준히 이야기해 온 것도 결국 이러한 가족과 관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유카와의 가족사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특히 친어머니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천재 물리학자나 사건 해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카와를 보여준다. 갈릴레오 시리즈가 30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유카와 마나부는 철저하게 사생활이 배제된 인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채 과학적 논리로 불가능해 보이는 트릭을 풀어내는, 그야말로 차가운 지성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드러난 가족사는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는 게 솔직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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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가 시리즈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마련한 설정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복선 회수의 쾌감보다는 "유카와에게 이런 사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는 채 작가와 작별하게 되었다는 아쉬움도 함께 남았다. 다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마지막 유작인 <영원의 기억>(국내 출간 예정)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작품에서 유카와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질지, <투명한 나선>에서 드러난 새로운 면모가 어떤 방식으로 되살아날지 기대하게 된다(사실, 이 내용이 나올지 확실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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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지바현 앞바다에서 한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시신의 등에는 총상이 남아 있었고, 사법 해부 결과 타살 가능성이 분명해진다.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그를 실종 신고했던 동거 여성은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직장까지 휴직한 채 사라졌으니 자연스럽게 의심이 쏠리지만, 그녀에게는 범행이 불가능해 보이는 알리바이가 있다. 여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까지 등장하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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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난항을 겪는 가운데 경시청 수사1과의 형사 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사건을 추적하던 중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과 마주한다. 바로 유카와 마나부다. 늘 그렇듯 구사나기의 수사 협조 요청을 단칼에 거절할 것 같았던 유카와는 이번만큼은 묘하게 다른 태도를 보인다. 수사에 협조하면서도 자신만의 목적이 있는 듯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우쓰미는 그런 유카와가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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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사건을 제시하고 수상한 인물을 배치한 뒤, 조금씩 단서를 쌓아가며 독자의 추리를 유도한다. 하지만 <투명한 나선>의 중심은 단순히 범인이 누구인지, 어떤 방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히는 데 있지 않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독자의 관심은 유카와가 왜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로 옮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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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자네는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라는 유카와의 말은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갈릴레오 시리즈를 읽어 온 독자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카와를 냉철한 물리학자이자 비논리적인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천재, 경찰이 풀지 못하는 난제를 해결하는 탐정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무엇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살아왔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투명한 나선>은 사건 해결자라는 역할 뒤에 가려져 있던 인간 유카와를 비로소 꺼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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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투명한 나선>도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묘하게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사람들의 삶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사라진 듯했던 과거는 어느 순간 현재와 다시 겹쳐진다. 직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인연과 비밀이 나선을 그리듯 돌고 돌아 결국 다시 맞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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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에는 이러한 이미지처럼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있다. 누가 누구의 친부모인지, 실제로 혈연으로 이어져 있는지, 그리고 피가 이어져 있다고 해서 반드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DNA는 혈연관계를 드러내는 구조이지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피가 이어져 있어도 가족이 되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아무런 혈연이 없어도 서로를 지키고 보듬으며 가족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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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계는 한 세대에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부모,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성장한 아이, 그리고 뒤늦게 다시 만난 이들의 삶이 서로 포개지며 또 하나의 나선을 만들어낸다. 나선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조금씩 다른 위치로 나아간다. 이처럼 삶은 이전과 똑같이 반복되지 않지만, 부모 세대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자식 세대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과거의 관계가 세대를 거쳐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며 이어지는 과정 역시 이러한 나선의 움직임과 닮아 있다.




그래서 강렬한 트릭이나 숨 가쁜 반전을 기대한다면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결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리즈를 오래 읽어 온 독자에게는 이번 작품이 지닌 감정의 무게가 더욱 깊게 다가올 것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이 인간의 사랑과 희생을 통해 유카와의 내면을 흔들었다면, <투명한 나선>은 유카와 자신의 삶과 과거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오며, 사건 해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유카와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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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나선>이 보여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혈연 자체라기보다, 혈연과 기억, 그리고 선택이 세대를 거쳐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과학과 논리를 앞세워 온 갈릴레오 시리즈가 마침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묵직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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