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 집을 갖추다 - 리빙 인문학, 나만의 작은 문명
김지수 지음 / 싱긋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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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직장인들이 52시간 근무제로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 워라밸이라는 것에 전혀 무관심하거나 혹은 수용 자체를 거부하던 기성세대와,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MZ 세대 사이에 껴서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나는 두 세대 사이에 그야말로 '낀 세대'다. 솔직히 워라밸에 대해서 살짝 어정쩡한 입장이다. 나는(라떼는!!ㅎㅎ) 신입 시절부터 팀장이 야근을 하면 할 일은 다 마쳤어도 눈치 보며 동반 야근을 했었는데 후배들은 일이 아직 남았어도 "선약이 있어서요."라며 당당하게 퇴근을 했더랬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또 다른 한편으론 쿨하고 멋져 보여 '브라보!'하고 감탄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은 사랑하지만 내 손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수고로움은 즐기지 않는 성격도 특별한 라이프 스타일이랄 것을 가지지 못하는데 한몫했다. 그런 나에게 <가구, 집을 갖추다>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구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응당 갖추어져있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또 너무 익숙하게 자리 잡아버린 존재라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인문학책 <가구, 집을 갖추다>로 가구의 역사와 트렌드의 변화 그리고 숨은 이야기들을 만나보았다.



 


노위전 우드(Norwegian Wood)라는 표현의 애매한 울림이 이 음악과 그 가사를 지배하고 있다. 그 불가사의한 깊이야말로 이 노래의 생명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가구, 집을 갖추다>p.89


하루키의 작품들은 고독하고 우울하다. 때론 절박할 정도로 외로워서 몸부림을 친다.(...) 가장 대표적인 허무의 감성은 작품 <상실의 시대>에 녹아 있다. 원래 원제가 '노르웨이의 숲'인데 국내에서 일부러 제목을 바꿨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자 소설 속에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는 부분인데,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스의 곡 <노위전 우드>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구, 집을 갖추다> p.90



 


며칠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한번 읽었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삼십 년 만이다. <가구, 집을 갖추다> 덕분에 학창 시절에는 몰랐던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 책의 제목에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으로 이 제목은 비틀스의 노래 <노위전 우드>에서 가져온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wood를 숲으로 해석했는데 우드를 단수로 쓰면 가구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 때문에 한때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은 오역 논란이 있었고 그전에 이미 비틀스의 팬 사이에서도 원곡에서 의미하는 것이 숲인지 가구인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한다. 노래의 가사를 직역하면 숲보다는 가구가 문맥상 맞는다. 이야기는 숲이 맞느냐, 가구가 맞느냐가 아닌 노르웨이산 가구의 의미로 넘어간다. 비틀스가 노르웨이산 가구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세련된 북유럽 가구가 아니라 범용적으로 판매되는 소나무 가구를 의미한 거라고 한다. <노위전 우드>가 숲도 아니고 노르웨이의 세련된 가구도 아닌 싸구려 소나무 가구를 의미하는 거였다니! 놀랍고도 재미난 가구 이야기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을 살펴보면, 곤룡포와 익선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서구식 두발에 양복을 입었으며, '화'라 불렀던 왕의 신발 대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었다. 고종이 앉은 의자는 신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좌측은 일월오봉도 앞에 늘 위치했던 위엄스러운 왕좌인 반면에, 우측의 의자는 웅장함보다는 격조와 품의가 느껴지는 서구식 의자로 유추된다. 

 <가구, 집을 갖추다> p.198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면서 맞은 리빙 문화적 관점에서 가장 큰 변화는 좌식 문화에서 부분적 입식 문화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조선 왕실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나전칠기 가구가 아닌 서구의 앤티크 가구를 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왕실의 단아하고 절제적이었던, 심지어 소박했던 좌식 가구들은 사라지고 대한제국 황실이란 개명된 이름을 갖자 입식으로 거듭나면서 무척 화려해졌다. 고종황제가 썼던 화장실의 세면대, 다이닝룸의 식탁은 물론 침실의 침대까지 모두 경복궁의 석조전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찬찬히 둘러보아야겠다.


 


인문 교양 에세이 <가구, 집을 갖추다>에는 가구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들부터 요즘 유행하는 인테리어 스타일까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흥미로운 이야기와 유익한 정보까지 담겼다. 재미있는 가구의 역사를 쫓아가다 보면 당대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까지 모두 섭렵하게 될 것이다. 리빙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 추천하는 인문 교양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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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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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는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잘 모르겠던 시절, 아마도 '청춘'이나 '젊은 날' 정도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그때의 모든 것이 담긴 소설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했음이 틀림없지만 당시엔 감히 사랑한다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감각 들이 모두 되살아났다. 아름답지만 돌아갈 수 없는 여름날, 아니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 시절은 가슴 한 편에 뭉근한 통증으로 남아 있었다. 그 통증은 <하버드 스퀘어>를 읽으며 나에게 다시 찾아왔다.


아버지는 여길 좋아했었어요?

나는 그랬다고 대답했다. 아주 좋아했었다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좋아했었다는 뜻이었다.

"졸업하고 나서야 이곳을 좋아하게 됐지."

 <하버드 스퀘어> p.17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아들과 함께 여름 캠퍼스 투어 중이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 함께 하버드 캠퍼스를 둘러보던 아들이 '나'에게  묻는다. "아버지는 여길 좋아했었어요?"  모든 게 신기루일지 모른다는 불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모래에 그린 선이 아니라 산골짜기처럼 느껴졌던 그때, 눈앞에 파티가 펼쳐져 있는데 초대받지 못한 느낌에 괴로워하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곳은 그에게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그의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아니었고, 그가 될 수도 없었던 곳이다. 1977년의 케임브리지, 그곳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누군가를 생각해낸다.



7월 말 방학을 맞아 텅 빈 하버드 캠퍼스에 거의 홀로 남겨지다시피한 '나'는 영문학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첫 번째 종합시험에 떨어졌고 딱 한 번의 재시험 기회가 남아 있었다. 17세기 문학에 관한 모든 책을 육 개월에 걸쳐 다시 읽기로 결심한 뒤 어느 날, 카페 알제에 죽치고 앉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있을 때였다. 무슨 주제든 상관없이 랩을 하듯 따다다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빛바랜 군복 윗도리를 입은 많아야 서른네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칼라지였다. 그는 노란색 체커 택시를 모는 택시 운전사로 낮 동안은 카페 알제를 비롯한 하버드 광장을 돌며 여자를 꼬시고 밤에는 택시 운전대를 잡으며 돈을 벌었다. 


그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그는 아랍인이었고 나는 유대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즉시 역할을 바꿔서 살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등 떠밀려 시작한 방랑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행성에 속해 있었지만 나는 이 행성에 속해 있다는 확신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세상을 사랑했고 사람들을 이해했다. 누군가 그를 힘껏 밀쳐도 그는 곧 중심을 잡고 자기가 갈 방향을 찾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도 항상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항상 뒤처진 느낌이었다. 

 <하버드 스퀘어> p.74



칼라지와 함께 하는 동안 늘 그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뭔가에 길들여지고 억눌려 있었던 그와 달리 제멋대로인 칼라지가 부러웠고 항상 그를 배우고 싶어 했다. 한편으론 그와 함께 하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 열네 살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집트에서 추방되었던 '나'는 튀니스에서 자랐지만 열일곱 살이 되던 해 프랑스로 쫓겨난 칼라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서로 거울을 보듯 비슷한 면이 많은 그들이 다른 점이라면 칼라지는 택시운전사였고 '나'는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는 것이며 칼라지에겐 없는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칼라지는 곧 추방될 위기에 몰려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다. "말해봐요."

칼라지는 숨을 가다듬었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해서 상을 차렸어.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근데 나는?" 그가 잠깐 망설였다. "에 무아(나는)?"

<하버드 스퀘어> p.271



칼라지와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조촐하게 파티를 열었다. 칼라지가 만든 고기 스튜와 나머지 친구들이 가져온 술과 음식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칼라지가 갑자기 문을 쾅 닫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칼라지는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을 위해 내가 요리를 해서 상을 차렸어. 근데 나는? 나는 뭐냐고?"라고 말하곤 흐느껴 울었다. 그는 곧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고, 튀니스를 떠나기 전보다 더 가난한 상태였다. 그 어두운 침실에서 흐느껴우는 칼라지를 보며 '나'는 생각한다. 칼라지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 그가 여기서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것을 잃는 모습은 자기 자신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자신의 운명이라는 생각. 주인공이 두 번째 종합시험에 떨어지면 칼라지와 동일한 운명에 놓이게 된다. 


"알겠어? 난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면서도 만찬을 준비한 요리사가 된 기분이야. 다들 즐겁게 먹고 마실 뿐, 이 식사가 끝나면 요리사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은 잊고 있지. 나는 그렇게 죽어가는 요리사가 되고 싶지 않아. 난 여길 떠나 다른 데로 가고 싶지 않다고. 난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아무도.

 <하버드 스퀘어> p.272



<하버드 스퀘어>를 읽는 동안 미래의 내가 잊지 않길 바라며 모서리를 접어두었던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오직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손 끝에 힘을 주어 모서리를 접었던 이유가 나에게 잊힐까 두려워서만은 아니라는 것은. 그것은 너무나 그립지만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기억에 대한 표식이기도 했다. 뜨겁고 아름다웠던 여름, 청춘. 그 한 시절이 오롯이 담긴 소설 <하버드 스퀘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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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하자키 일상 미스터리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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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추리소설의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자키 미스터리 삼부작 중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을 만났다. '하자키'라는 가상의 해변가 언덕에 위치한 목련 빌라가 이야기의 배경이다. 1호부터 10호까지 3호를 제외한 아홉 채의 이 층짜리 빌라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살고 있다. 각 호에 살고 있는 가족들끼리, 혹은 이웃 간에도 크고 작은 분쟁들이 일어나 좀처럼 조용할 날이 없는 목련 빌라는, 비어 있던 3호에서 얼굴과 손가락이 짓뭉개진 사체 하나가 발견되며 더욱 시끄러워진다. 너도 나도 탐정을 자처하며 범인을 색출하겠다는 주민들, 그리고 남몰래 품어온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까 두려운 또 다른 주민들, 그들 각자의 욕망은 도망치고 뒤쫓기를 거듭하다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과연 범인은 누구이며, 신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손이 으깨진 시체는 누구인가! 일상 추리소설의 여왕 와카타케 나나미는 7할 정도의 힘으로 스르륵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독자를 매혹시킨다. 과연 여왕이라는 찬사가 결코 부족하지 않은 이야기다.



레이코는 얼굴에 지어낸 웃음을 띠고 문을 열며, 자, 보세요, 하고 부부를 돌아봤다. 집 안을 들여다보던 부부가 시선을 황급히 거두고 레이코의 얼굴을 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왜 저러지, 하고 레이코는 생각했다. (...) 집을 한번 들여다보기만 하고 뒷걸음질 치는 손님은 이번이 처음이다. 설마 그야말로 흰개미가 대량으로 발생한 건 아니겠지. 레이코는 불안해져서 집 안을 들여다봤다. 남자가 누워 있었다. 레이코가 자랑한 대로 참으로 널찍한 현관홀에 양손 양다리를 뻗고 누워 있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죽은 사람이었다.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p.15



 


고다마 부동산 사모 레이코는 비어있는 3호를 보러 온 손님과 함께 목련 빌라를 찾았다. 목련 빌라의 장점을 막힘없이 술술 읊으며 잠긴 3호의 문을 여는 순간 널찍한 현관홀에 양손 양다리를 뻗고 누워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얼굴과 손이 엉망으로 뭉개진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죽은 사람이었다.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일에는 강한 태풍이 불어 목련 빌라 거주자가 아닌 이상 교통이 불편한 그곳으로 외부 사람이 들어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때문에 범인은 목련 빌라에 거주하는 내부자의 소행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목련 빌라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하나씩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3호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부동산 사장 부부, 남편이 몇 년째 실종 상태라 혼자서 쌍둥이 자매를 키우는 후유, 사체와 비슷한 체격 조건을 가진 남자친구와 몇 달 전 헤어진 노리코, 노리코에게 전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강요했던 노모 도키코, 그런 노리코를 짝사랑하는 타쿠야, 살인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 구급차에 실려간 시로 할아버지 등 누구 하나 의심 가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목련 빌라 거주민들은 조금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각자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어 범인을 특정 지을 수 없었고 수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사건 당일 하자키 해변의 유일한 호텔인 남해장에 묵었다는 베일에 싸인 인물로 유명 소설가 쓰노다 고다이와 만남을 가진 직후 호텔에 투숙했다는 '신도 카이'. 그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탐문 수사를 펼치던 형사 히토쓰바시와 고마지는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다. 신도 카이는 쓰노다 고다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사실. 수사가 지지부진하던 차에 목련 빌라의 트러블 메이커이자 스스로 탐정이라며 설치고 다니던 아케미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한 채 시체로 발견된다. 



 


"이별 파티를 열어줄까 싶어서요. 아내를 위해."

"아내에게는 친구가 없었어요. 친척도 거의 없습니다. 그 사람은 음울한 걸 아주 싫어했어요. 보통 경우라면 집에 스님을 모셔서 독경을 부탁드리고 나와 우리 부모님이 장례식을 마치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아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요. 어떠세요,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 이 레스토랑을 좋아하기도 했고."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 p.322



아케미가 살해당한 직후 남편 켄은 파티를 열겠다고 해 목련 빌라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남의 집 창문 아래에 몰래 숨어서 대화를 엿듣고 그렇게 알아낸 정보를 마구잡이로 퍼뜨린 밉상 아케미, 그녀를 위한 파티에 어느 누가 참석하고 싶을까? 누구 하나 파티를 반기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케미를 위한 파티를 준비하다 결국 아케미를 죽인 살인자를 잡게 되고, 목련 빌라 3호에 사체를 유기한 범인도 의외로 순순히 자수한다. 



바로 내 이웃집에서 손과 얼굴이 엉망으로 뭉개진 시체가 발생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목련 빌라 주민들은 살인사건이 가져온 패닉에도 맛있게 한 끼를 챙겨 먹고 태평하게 일상을 누린다. 비극은 비극대로 또 일상은 변함없이 유쾌하게 흐른다. 일본 추리소설 <하자키 목련 빌라의 살인>은 일상 추리소설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시종일관 편안하면서도 유쾌하다.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만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피철철' 추리소설이나 폭력성이 짙은 추리소설이 부담스러운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편안한'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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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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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리뷰 대회



미증유의 팬데믹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그림자를 가깝게 느낀다. 오늘은 쌍둥이들을 코딩 수업에 데려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한 아저씨를 보았다. 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을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확진자면 어쩌지? 아니, 백신 3차까지 모두 맞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어쩌면, 나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그로부터 전염되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문득 살아가기 위해 하는 나의 모든 행동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란 전능한 자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찍고야 마는 생의 마침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발생하는 천재지변과도 같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아직 죽음에게 내 삶을 강탈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말한다. 죽음이 그저 끝인 것만은 아니라고,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말이다. 오랫동안 죽음 곁에서 애도자들과 함께 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죽음이 생의 끝이라고 여겼던 막다른 골목에 서서 그 벽을 헐어 길을 내고 끝내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이 담겼다. 죽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두려운 마음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죽기 오 분 전에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렇게 하나 마나 한 뻔한 말을 하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심지어 죽음이 불가피할 때조차 생명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소멸되기 직전에도 여전히 버티면서 끝까지 공존할 방법이 남아 있다고 질병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동거는 죽음이 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명과 죽음은 끊임없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철학책 추천 <당신이 살았던 날들> p.22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의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이다. 저자는 랍비로서 많은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포착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 책으로 펴냈다. 홀로코스트, 테러와 같은 국가적 슬픔에도 함께 했고, 어린 동생을 잃은 역시 어린 형제가 겪는 개인적인 슬픔에도 함께했다. 랍비의 소임 중 하나는 죽은 이의 장례식장에서 애도자들을 위한 기도인 '카디시'를 낭송하는 일이다. 그녀가 죽음 곁에서 읊은 수많은 카디시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살아남음이란 또 무슨 의미인지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일깨워준다. 카디시를 낭송하기 위해서 저자는 유족들을 만나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채집한다. 랍비로서 참석한 장례식에서 그녀는 유족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유족들이 아는 이야기 그대로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녀만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다.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이다.



"난 동생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싶어요. 엄마 아빠는 어딘지 말할 줄 모르거든요. 결정을 못 하나 봐요. 내일 사람들이 동생을 땅에 묻어줄 거라고 해놓고, 또 동생이 하늘로 갔대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동생은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인문 에세이추천  p.139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저자가 랍비로서 만나온 죽음과 그곳에서 만난 이야기가 담겼다. 그중 동생(이사악)을 잃은 형을 만난 이야기는 퍽 가슴에 와닿았다. 죽은 이사악의 형은 저자에게 묻는다. 동생이 어디에 갔냐고,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느냐고. 아이에게 동생에 어디 갔는지 정확히 말해줄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셈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기에. 인간의 말을 벗어나는 죽음이라는 것은, 형언할 수 없다는 형식으로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의 비극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다"라고 했다. 마치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기초가 세워지는 기념물처럼, 죽음은 삶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삶이 새로이 건설되는 순간에 굳이 비극을 소환할 필요는 없다.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델핀 빌뢰르는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p.55)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철학책으로 추천하며 서평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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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살았던 날들 - 죽음 뒤에도 반드시 살아남는 것들에 관하여
델핀 오르빌뢰르 지음, 김두리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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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팬데믹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그림자를 가깝게 느낀다. 오늘은 쌍둥이들을 코딩 수업에 데려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한 아저씨를 보았다. 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을까,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확진자면 어쩌지? 아니, 백신 3차까지 모두 맞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진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어쩌면, 나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그로부터 전염되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까지 이르렀다. 



문득 살아가기 위해 하는 나의 모든 행동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죽음이란 전능한 자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찍고야 마는 생의 마침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발생하는 천재지변과도 같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아직 죽음에게 내 삶을 강탈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말한다. 죽음이 그저 끝인 것만은 아니라고,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말이다. 오랫동안 죽음 곁에서 애도자들과 함께 해온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죽음이 생의 끝이라고 여겼던 막다른 골목에 서서 그 벽을 헐어 길을 내고 끝내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모습이 담겼다. 죽음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었고 두려운 마음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죽기 오 분 전에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렇게 하나 마나 한 뻔한 말을 하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심지어 죽음이 불가피할 때조차 생명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소멸되기 직전에도 여전히 버티면서 끝까지 공존할 방법이 남아 있다고 질병을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동거는 죽음이 와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생명과 죽음은 끊임없이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철학책 추천 <당신이 살았던 날들> p.22



철학책 <당신이 살았던 날들>의 저자 델핀 오르빌뢰르는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이다. 저자는 랍비로서 많은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그곳에서 포착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이 책으로 펴냈다. 홀로코스트, 테러와 같은 국가적 슬픔에도 함께 했고, 어린 동생을 잃은 역시 어린 형제가 겪는 개인적인 슬픔에도 함께했다. 랍비의 소임 중 하나는 죽은 이의 장례식장에서 애도자들을 위한 기도인 '카디시'를 낭송하는 일이다. 그녀가 죽음 곁에서 읊은 수많은 카디시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살아남음이란 또 무슨 의미인지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일깨워준다. 카디시를 낭송하기 위해서 저자는 유족들을 만나 죽은 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채집한다. 랍비로서 참석한 장례식에서 그녀는 유족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을, 유족들이 아는 이야기 그대로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녀만의 언어로 번역해 주는 것이다. 죽은 이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말이다.



"난 동생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싶어요. 엄마 아빠는 어딘지 말할 줄 모르거든요. 결정을 못 하나 봐요. 내일 사람들이 동생을 땅에 묻어줄 거라고 해놓고, 또 동생이 하늘로 갔대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동생은 땅으로 내려간 거예요, 아니면 하늘로 올라간 거예요?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요."


인문 에세이추천  p.139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는 저자가 랍비로서 만나온 죽음과 그곳에서 만난 이야기가 담겼다. 그중 동생(이사악)을 잃은 형을 만난 이야기는 퍽 가슴에 와닿았다. 죽은 이사악의 형은 저자에게 묻는다. 동생이 어디에 갔냐고, 어디를 가야 동생을 찾을 수 있느냐고. 아이에게 동생에 어디 갔는지 정확히 말해줄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셈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기에. 인간의 말을 벗어나는 죽음이라는 것은, 형언할 수 없다는 형식으로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의미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을 전하는 데에만 종종 쓰일 뿐이다. (p.139)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죽음의 비극은 죽음이 삶을 운명으로 바꾸어놓는 데 있다"라고 했다. 마치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기초가 세워지는 기념물처럼, 죽음은 삶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삶이 새로이 건설되는 순간에 굳이 비극을 소환할 필요는 없다. 삶을 결코 그 삶의 끝인 죽음으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살면서 끝없이 계속되리라 여기라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을 말하기보다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었을 모든 것을 말하라고 델핀 빌뢰르는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다.(p.55)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철학책으로 추천하며 서평을 마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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