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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T - 내가 사랑한 티셔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평점 :

컬렉션 중에 내가 가장 아끼는 티셔츠는 어느 것인가? 그건 역시 'TONY TAKITANY' 티셔츠다. 마우이 섬 시골 마을의 자선매장에서 이 티셔츠를 발견하여 아마 1달러에 산 것 같다. 그리고 '토니 타키타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 내 맘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을 썼고, 영화화까지 됐다.
<무라카미 T> 책머리말 중에서 P.9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재즈 연주로 바빠 늘 집을 비우던 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라, 항상 '감정적 결여'상태인 '토니 타키타니'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은, 단돈 1달러에 산 티셔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루키가 마우이 섬 시골 마을의 자선매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티셔츠는 미궁 속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그를 하나의 이야기로 인도했다. 티셔츠 한 장에 하나의 이야기, 하루키가 안내하는 티셔츠의 세계로 가보자!
재밌어서 사고, 기념으로 받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여버린' 수백 장의 티셔츠와 그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무라카미 T>! 책으로까지 엮어낸 티셔츠에 대한 사랑은 그 규모에 놀랍기도 했지만 더욱 경탄을 자아내게 했던 것은 하루키의 티셔츠에 대해 세운 명확한 세계관이었다. 티셔츠에 대한 그의 철학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확고했다. 구입처는 굿윌 스토어나 우연히 들른 중고 매장이었고 가격은 1달러나 1달러 99센트 정도로 저렴한 티셔츠가 주 타겟이다. 싸다고 무조건 다 사는 것도 아니고, 구입한 티셔츠를 다 즐겨 입는 것도 아니다. 티셔츠들에 얽힌 일화들을 읽다보면 소탈하면서도 고상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 깐깐한(?) 하루키의 취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페라리나 람보르기니가 그려진 티셔츠는 통상의 사회적 감각을 가진 어른은 일단 소화하지 못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괴짜라면 몰라도 보통은 그런 옷을 입으면 "애냐"하는 소릴 듣기 마련이다. (중략) 뭐, 이렇게 팔짱 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폭스바겐 정도가 딱 좋으려나"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신기하게 폭스바겐이 그 적정한 포지션에 딱 들어맞더라고요. 이를테면 빨간색 '뉴 비틀' 티셔츠는 제법 부담없이 입을 수 있어서 좋다. 거리에 입고 다녀도 그리 민망하지 않고 딱히 으스대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비틀도 물론 중산계급층 느낌이긴 하지만, 궁상맞지 않고, 나름대로 타는 사람의 라이프스타일도 넌지시 보여준다.
<무라카미 T> p.78
마음에 드는 낡은 티셔츠 한 장과 그에 관한 밑도 끝도 없는 하루키의 이야기는 '위스키 좋아하세요?' 라든가 '삼십오 년쯤 전의 일이다'라는 힘을 툭툭 뺀 편안한 문장들로 시작된다.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를 바라보듯 과연 티셔츠로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지 궁금해하던 나는 끝내는 감탄하고야 만다. 하루키가 낼 수 있는 필력의 몇 할 정도만 할애해도 이렇게 재미있는 에세이집이 나올 수 있구나, 싶어서.
취미부자, 취향부자이면서 아는 것도 많은 하루키의 이야기가 장광설로 느껴질 무렵이 되면 실내 오염도를 감지한 공기청정기가 자동으로 작동하듯 '뭐 나름 괜찮을지도...'라든가 '당신은 어떠신가요?'라며 또 다시 힘을 툭툭 뺀 자연스러운 문장들로 끝을 맺는다. 강약조절, 맺고 끊음이 역시 하루키답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이며 가볍게 읽기 시작해, 마지막엔 내 취향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내 서랍장에 즐비한 핑크색, 하늘색의 무지 티셔츠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잖아, 라는 작은 탄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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