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만세 ㅣ 소설, 향
오한기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5월
평점 :

사람 입장에서만 생각했나. 사람마다 먹는 음식과 내장 기관의 특성이 다르고, 그에 따라 똥의 성분이 상이할 텐데 변기 하나가 너무 다양한 똥을 받아들여서 과부하가 걸리는 것 아닐까. 혹시 너무 많은 자들이 엉덩이를 들이댔기 때문일가. 아니면, 낯이라도 가리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토악질을 하는 걸까. 너무 역겨워서 똥을 먹지 못하고 뱉어내는 걸까, 그런데 변기도 똥을 더럽다고 생각할까?
<인간만세> p.37
세 명의 유아를 키우는 나는, 아이들이 매일 보는 변의 엄정한 관찰자이다. 아이들의 변 상태를 면밀히 확인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인데, 변이 너무 묽거나 혹은 너무 단단하거나, 아예 변을 보지 못하거나 하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어야 우리 아이들의 하루가 무탈하고 나의 하루도 무탈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똥이 더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래서인지 똥 이야기가 주인, <인간만세>에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고 하면 비약일까. 심지어 똥 이야기를 자꾸 하는 소설 속의 '나'는 타고나길 비위가 약하다고 했다. 서평에 자꾸 똥, 똥 거려서 혹여나 비위 약하신 분들이 읽고 계시다면 죄송한데 똥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인간만세>의 전반적인 에피소드들이 다 너무 웃겨서 눈물을 흘려가며 읽었다. 그런데 책의 맨 뒷부분 작품 해설을 읽고는 살짝 놀랐다. 마치 눈물까지 흘려가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나에게 조한기 작가님이 슥 나타나 "독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며 정색하는 느낌이었달까. 눈물나게 웃긴 소설인 줄 알았는데 눈물나게 어려운 소설이었나, 싶어 배신감을 느끼던 찰나 "상징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니라 독자들이 만드는 거죠.(p.153)"라는 작품 속의 문장대로 나는 이 소설 속의 상징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징은 내가 만드는 거다, 똥은 똥이다, <인간만세>는 재미있다!
민활성의 질문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스무 살이 되면 작가 자격증 취득 시험을 칠 수 있다고 둘러댔다. 민활성은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상주 작가가 되겠다는 이야기를 엄마한테 했는데 상주 작가는 사회낙오자나 하는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인간만세> p.37
<인간만세>는 저자의 답십리도서관 상주 작가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등장인물들이 다 실존인물같아 살짝 에세이 같기도 하다. 이 사회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특이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10년 간의 은행원 생활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은행을 털고 싶고 싶다고 답십리 도서관 상주작가에 고백하는 은행원과 자기 허리에 찬 총이 가스총인지 모르는 청원경찰은 국내 은행 어느 지점에 한 명쯤은 분명히 있다. 있을 것 같다. 모든 문학은 쓰레기라고 말하는 KC나, 수업 중에 작가이자 강사의 마이크를 훔쳐 달려나가며 마이크에 똥이라고 외치는 민활성이나, 소설가 출신에 문화부 장관이 되어 더 많은 소설가들을 거느리고 싶다는 꼰대 관장이나 저자는 허구적 인물이라고 못박았지만 실존인물일 것 같다(ㅋㅋㅋ). 진진이 상주작가를 두고 결투를 신청했다는 대목에서는 몇 달전 동네 통장 자리를 두고 어르신끼리 싸움이 났다는 소문이 생각났다. 역시, <인간만세>에는 다이나믹한 우리네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렇듯 <인간만세>에 재미진 에피소드가 넘쳐남에도 '명랑 코믹' 활극이 아닌 것은 부조리한 우리 인생을 굉장히 적확하고 명징하게 담았기 때문이 아닐까. 상주 작가는 사회낙오자나 하는 거라는 민활성의 엄마의 말이, 그런 시선이 <인간만세> 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아우른다. 상주 작가는 사회낙오자라는 메타포는 진진, KC,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을 낙오자의 범주에 그러넣는다. 오한기의 인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전력투구하지만 낙오자는 낙오자다. 그들은, 어쩌면 나도 민활성의 엄마가 그어버린 선 밖으로 결코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사실에 살짝 현타가 올 때쯤이면 똥-괴물인 EE가 나타난다. 똥이야기에 환장하며 책을 씹어 삼키는 똥-괴물 EE. 그래, 이 부조리한 인생 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