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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ㅣ 트리플 4
임국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5월
평점 :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좋아하는 사람인가. 그것을 어떻게, 왜 좋아하는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런 질문에 골몰한 까닭은 아마 취향에 관한 정확한 문답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지점을 드러내고 개인과 타자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요소라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수진의 말마따나 그것을 빼놓고는 자신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p.132
잊었던 내 세계를 만났다,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 카드캡터 체리, 란마 1/2, 일요일 아침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눈만 말똥말똥 뜬 채 시청하던 디즈니 만화 영화까지. 다정하고 말랑말랑한 기분에 잠시동안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 내가 몇 살이었지, 엉망진창인 채 정리되지 않는 서랍장 내용물처럼 정확한 기억은 나진 않지만 내가 참 좋아하던 시절이라는 느낌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는 것을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를 읽으며 깨달았다. 참 신기하다, 내 기억을 나보다 더 잘 기억해내는 책이 있다니.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코인노래방에서>, <추억은 보글보글> 세 편의 소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여러 추억을 소환해낸다. 만화, 오락, 코인 노래방, 팝송 등 우리를 매혹시켰던 것들을 찾아 과거로 추억 여행을 떠난다. 그 시절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를 향해.
아이들이 만화를 보는 데 따로 이유가 어디 있었겠느냐만 그들의 애니메이션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명확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그곳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실의 물리법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멋진 신세계가 TV 속에서 펼쳐졌고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바로 저런 세상을 꿈꿨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 p.12
그 시절에는 모든 것을 만화로 깨우쳤던 것 같다. 우정, 사랑, 질투, 배신. 그 모든 것을 만화 속 주인공을 통해서 배웠고 그것에 쉽게 매혹되었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수진처럼 말이다. 시간이 흐르며 어른이 된 나는 그렇게 좋아하던 시절을 TV 전원을 끄듯 스스로 정리해버렸고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책을 읽다말고 신랑한테 내밀며 "이거, 기억나지?"라고 물었다. 모든 이에게 묻고 싶었다, "그때 그 시절, 그거 기억나지!?"
세일러 문, 슬램덩크, 브리트니 스피어스, 보글보글, 슈퍼 마리오 등 지금은 레트로로 명명되는 트렌드가 소환되는 이유는 아마 그것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까. 그 당시엔 나의 세계 그 자체였던 그것들을 잊을 수가 있는지, 잊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고 살 수가 있는지.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를 읽는 내내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 낸것처럼 잊고 있었던 다락방에 다다른 것처럼 하나둘씩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떤 아이였는지. 부지깽이로 잿더미를 쑤시다 겨우 찾아낸 불씨처럼 미력한 지난날의 추억뿐이지만(p.102), 아니 그것은 추억 뿐인 것이 아니다. 수면 아래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던 그 무엇, 나의 자아, 나의 꿈, 나의 한 시절이었다. 마법같은 그 시절에 울고 웃었던 나,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만나고 돌아온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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