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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손민지 지음 / 디귿 / 2021년 5월
평점 :

씩씩한 '혼자'들의 독립생활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녘 출판사의 에세이 브랜드 '디귿'에서 세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바로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앞서 나온 두 권의 에세이도 좋았지만 세 번째 책은 정말 좋았다. 디귿의 에세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깨뜨려주고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의 일면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달리는 여자, 사람의 달리기 이야기
집 바로 앞에 전국구 스포츠 경기가 개최되는 비교적 큰 규모의 트랙이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 탓에 출입이 제한되지만 무료로 입장이 가능한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와서 걷기도 달리기도 한다. 빠른 속도로 전력질주하듯 달리는 러너들을 보면서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었지, 그들이 왜 달리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달리기'라는 것에 그렇게 큰 소우주가 존재할 줄이야,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의 깊고 단단한 이야기를 읽고 나니 어느새 나도 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것만 같은데, 계약이 종료될 때면 나는 매번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떤 관계는 노력과 상관없이 한순간에 끝났고, 또 어떤 관계는 이유도 모른 채 멀어지기도 했다. 끝까지 가지 못하고 이탈해버린 일들 사이에서, 실패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저런 일들의 총합으로 인해 어느새 내 안에는 '해도 잘 안될 거라는' 무기력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면서 내가 흘린 땀과 내딛었던 한 발 한 발이, 1분 1초가 그대로 몸에 축적돼 근육으로, 지구력으로 쌓였다. 시간을 들인 만큼 더 잘 달리게 되었고, 더디지만 결국 목표에 다다랐다. 내게는 그런 경험이 간절히 필요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주는 일.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p.34
나 역시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이탈해버린 일로 인해 짙은 무기력함에 팽배해있었다. 이 무기력함은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할 용기와 긍정적인 마음을 갉아먹었고, 종국에는 나 자신을 갉아먹기에 이르렀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에 가속도가 붙어버리면 중간에 멈추기가 참 어렵다. 내 눈앞에 다가온 기회일지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놓쳐버리며, 나 자신을 잃어가는 일에 무감한 날들이 이어졌다.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을 읽는 동안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저자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기본 체력이 좋지 못해 잔병 치레가 잦고, 어려운 인간관계는 쳐내는 게 차라리 쉬운, 모든 일에 잘 지치는 나와 너무도 닮은 모습에 위로가 되었다.
내게는 여전히 '이거 아니면 안 된다'싶을 정도로 확신이 생기는 게 없다. 몽상가처럼, 어쩌면 아직 발휘되지 않은 잠재적 재능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p.58
내가 그렇듯, 나보다 먼저 나아간 친구들 또한 확신으로 각자의 길을 찾아간 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도 나처럼 한 발짝 떼기도 두려웠던 날조차 불안과 망설임을 안고서 달려갔던 걸까.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p.83
마음의 에너지는 유한하다. 좋아하는 마음도 고갈된다. 언젠가 성급하게 서로를 알아갔던 연인과는 더 빨리 끝났고, 꼭 무리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나면 번아웃이 왔다.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에도 약간의 요령이 필요하다. 나는 계속해서 달리고 싶어서 좋아하는 마음을 잘게 쪼개어 꺼내 쓴다.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 p.89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은 달리는 여자, 사람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달리기로 시작했지만 달리기 그 이상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이런 이유로 달리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나와 비슷한 면을 가진 사람을 만났고 또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책이다. 회사를 다닌 지 10년이 넘었지만 어려운 것들은 아직도 쉽게 풀리는 법이 없고, 나도 모르는 무언가, 내가 잘하는 게 있을 거라는 몽상은 여전하다.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만 뒤처지는 느낌은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 마음의 에너지는 유한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쉽게 고갈된다. 나의 가장 멋진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때'를 기다리며, 나도 마음을 잘게 쪼개어 꺼내어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