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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9월
평점 :

전설이라 불리는 예술가 33인, 아니 '전설'이라는 단어도 완벽하게 그들을 포용해주지 못하는 느낌이다. 진부한 단어에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예술가 33인을 뭉뚱그려 넣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어떤 언어로도 그들을 오롯이 담아낼 수가 없다.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33인의 예술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남겨진 작품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호쿠사이가 남긴 말은 이렇다. "내게 5년이란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텐데."<예술가의 일>- 일본이라는 환상의 시작 '가쓰시카 호쿠사이' p.69
1856년 일본이 유럽으로 도자기를 수출하며 포장지 목적으로 끼워 넣은 종이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프랑스의 화가 브라크몽은 그것을 마네, 드가 등 친구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은 신세계 보물을 마주한 듯 매혹되었다고 한다. 그 그림은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이었다. 빈센트 반고흐 역시 일본 풍속화 500여 점을 수집할 정도로 일본 미술에 심취했고, 그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의 소용돌이치는 하늘은 호쿠사이가 그린 파도의 매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호쿠사이의 삶은 아찔할 만큼 그림으로만 가득하다.(p.65) 그는 일생동안 약 3만 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매일 한 점씩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려도 80년이 걸리는 분량이라고 한다. 더욱이 더 놀라운 것은 70년 내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그림만 그렸던 그가 아직 못 그린 것이 많다며 비통해하며 갔다는 사실이다. 오로지 예술만을 위한 최대한의 삶을 살다가 떠난 그는 경탄을 자아낸다. 그런 그에 비하면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한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가우디는 "신은 서두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가우디 역시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벽돌 하나 하나 차곡차곡 쌓듯 설계했다. 불편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멈추지도 않았다. 느리지만 계속 앞을 향해 걸었다.<예술가의 일>- 묵묵히 벽돌 하나를 더 쌓았다 '안토니 가우디' p.121
건축에 천착하며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가우디, 피카소가 "탐욕적인 노인네'라며 그를 공격했지만 실은 가우디는 평생을 수도승처럼 지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육식도 하지 않았으며 조그만 집에서 소박한 삶을 살며 죽기 직전까지 벽돌 하나를 더 쌓는데 집중했다.
처음부터 세상이 가우디의 천부적 재능을 알아보았을까? 아니다. 그는 류머티즘을 앓아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더뎠다고 한다. 이후 바르셀로나 건축학교에 진학했지만 최하위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으며 가난했던 탓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생 신분일 때부터 건축사무소를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고 한다. 우연히 스페인 사업가 구엘을 만나게 되고 이후 가우디는 마음껏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바르셀로나 곳곳에 거대하고 환상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그는 오직 건축만을 생각했다. 위대한 몰입으로 가득했던 천재 예술가가 남긴 작품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눈이 부시게 빛난다.
<예술가의 일>에는 세상의 이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간 예술가들의 33가지 이야기가 담겼다. 치열하게 분투해야 했던 고단한 삶조차도 끝내 그들을 꺾지 못했다. 영화를 찍기 위해 세상과 싸워야 했던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그는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새벽에 직접 장을 봐서 스태프들의 밥을 지었고 촬영 현장에서는 한살배기 딸을 포대기에 업고서 촬영을 지휘했다.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하는 사회에 저항했던 나혜석, 그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스키아는 예술의 문법을 뒤집어 그 스스로가 새로운 문법이 되었고,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며 온갖 경계에 부딪힌 이타미 준은 결코 위측되지 않고 묵묵히 경계 위에 건물을 지었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위대한 유산이 되었다. 그들의 삶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감화를 느끼며 가슴이 웅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