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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노르웨이의 숲>을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읽는 내내 오래전 지나온 계절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는 너무도 선명해서 절대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과 장소,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희미해진다. 한때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기억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순간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서른일곱 살이 된 와타나베가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그는 스무 살 무렵의 기억과 그 시절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와타나베에게는 기즈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와타나베와 기즈키, 그리고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는 늘 함께 어울렸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던 어느 날, 기즈키는 아무런 예고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와타나베는 고향을 떠나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지만 기즈키의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도쿄에서 우연히 나오코와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기즈키를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만, 그 관계는 평범한 사랑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날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고, 이후 나오코는 갑자기 와타나베의 곁을 떠난다.
몇 달 뒤 도착한 편지를 통해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교토의 산속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나오코를 찾아간다. 아름답고 고요한 자연 속에서 나오코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만, 기즈키의 죽음과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를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던 중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나오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미도리를 만난다. 봄날의 들판을 뒹구는 새끼 곰처럼 생동감 넘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고독한 일상에 거침없이 뛰어든다. 나오코가 상실과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서 있다면, 미도리는 지금 살아 있는 현실과 앞으로 나아갈 삶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점차 미도리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며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이 뒤엉킨 스무 살의 시간을 통과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미도리를 향해 커지는 감정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그러는 동안 나오코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결국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기즈키에 이어 나오코마저 잃은 와타나베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듯 홀로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를 걷고 낯선 곳을 떠돌며 나오코의 죽음을 오래도록 슬퍼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뒤 와타나베가 깨닫는 것은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연이어 잃으며 그는 이 묵직한 진실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배워나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죽음을 조금씩 품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어떤 진리나 강인함만으로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결국 그 슬픔을 끝까지 겪어내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며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소설의 시선은 놀랄 만큼 담담하다. 상실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슬픔과 짙은 여운이 남는다.
<노르웨이의 숲>은 청춘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억과 죽음, 고독과 성장에 관한 소설이다. 이제 막 뜨거운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미 그 시절을 멀리 보내고 가끔 뒤돌아보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래전 잊고 지냈던 누군가와 그 시절의 나 자신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