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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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체가 하나의 장르이고 브랜드인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소설이 어떻게 재미있고 어떤 반전이 있고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게이고의 작품이다,라는 한 마디만으로도 재미가 보증되는 느낌은... 저만 그런 게 아니잖아요? :)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 재미없는 소설을 찾는 게 오히려 어렵게 느껴지고 그가 내는 추리소설마다 족족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 것도 소설의 재미를 증명하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몽환화> 역시, 당연히 재미있었다. 그가 장장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인 작품이라는 사실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던 촘촘한 웰메이드 추리소설이다. 





일본 추리소설 <몽환화>는 두 개의 프롤로그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느 이른 아침, 이제 막 한 살이 된 아이를 안은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평화로운 장면에 난데없아 긴 일본도를 든 남성이 등장한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사건! 이 남성은 미친 기세로 사람이 보이는 족족 칼을 휘두르고 부부 역시 즉사한다. 아내에게 안겨 있던 아이는 무사할까, 궁금증이 드는 순간 화면은 전환된다. 나팔꽃 박람회에서 우연히 만난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중학생 소타, 학생의 본분을 잊고 딴 데 한눈 판다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그의 첫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별을 맞게 된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꼭 기억해두어야 한다. 두 프롤로그에서 돋아난 이야기가 무성하게 줄기를 뻗어 벽 하나를 푸르게 잠식해버린 신비로운 덩굴 담이 연상되는 추리소설 <몽환화>를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두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겠는 상황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시 두 개의 죽음을 독자에게 내민다. 이제 막 주류 시장으로 진입을 앞둔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리더 나오토의 자살과 그의 조부인 슈지의 피살 사건. 앞서 등장한 프롤로그에 이어진 두 죽음, '아... 도저히 모르겠어...!'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매직 월드에 기꺼운 마음으로 입장했다!





한때 수영 유망주로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내기도 했던 리노는 갑자기 수영을 그만둬버린다. 삶의 목표와 방향을 잃고 가끔 홀로 계신 할아버지 댁을 찾아 대화를 나누는 게 유일한 삶의 낙이었던 그녀. 학교 수업을 마친 후 할아버지와 함께 먹을 와플을 사서 그를 방문한 어느 날,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자신과 통화했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할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리노는 할아버지의 집안에서 사라진 무언가를 감각해낸다. 사건은 진척 없이 난항을 겪고 리노는 직접 범인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소타를 만나게 된다.



"나도 말이야, 너와 똑같았단다. 네 아버지와는 피를 나눈 남매인데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 딱히 언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잠깐이지만 벽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나한테 뭔가를 숨기는 것 같았거든." 아야코가 창을 등지고 소타를 바라봤다. "하지만 소타, 그건 말이야, 건드리면 안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

 p.119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저를 응원해 주었어요. 시합이 있으면 멀어도 꼭 와주셨고요. 그러면서도 올림픽 같은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리노가 수영하는 걸 보는 게 좋다고만 하셨죠. 수영을 그만둔 후에도 왜 그만뒀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틀림없이 누구보다 슬퍼하셨을 텐데. 아무래도 할아버지는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알고 계셨던 거죠." 

p.283


리노와 소타는 처음 보는 사이지만 어쩐지 서로가 편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된 듯한 리노, 가족과 유대감이라곤 없는 소타, 둘이 서로에게서 같은 종류의 외로움을 느꼈기 때문일까. 리노는 소타에게 말한다. "우리, 어딘가 닮았어요. 열심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둘은 함께 힘을 합쳐 사건의 진상에 차츰차츰 가까워진다. 그리고 사건의 모든 비밀과 핵심을 알고 있는 키 맨이 등장해 모든 비밀을, 몽환화에 얽힌 모든 것을 낱낱이 해소해준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 <몽환화>에는 요즘 흔하디 흔한 치정, 복수 그 어떤 '매운' 소재가 1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면 응당 지켜야할 도의, 도덕, 소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토록 건전하게 재미있는 순한 맛의 장르소설이라니! <몽환화>에서 소타가 한 말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그냥 내버려둬서 사라진다면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받아들여야 해. 그게 나라도 괜찮지 않겠어?" 잠깐 잊고 있었던 나의 소명에 대하여, 내가 무엇에든 누군가에든 진 빚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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