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곽재식 지음 / 비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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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을 읽는 내내 마음 속에서 뭔가 꼼지락꼼지락 자라나는 게 느껴졌다. 이 소설을 쓴 작가님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면 업고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야하겠다고 다짐했고, '곽재식'이란 세 글자가 박힌 책은 모조리 읽어보겠다는 의지도 다졌다. 그래, 내 마음 속에서 꼼지락대며 자라나던 것은 '애정하는 마음'이다! 곽재식 작가님이 쉐프라면 돌멩이로도 맛있는 수프를 끓여냈을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에, 발에 채이듯 흔하디 흔한 소재로도 웃음이 빵빵 터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한국 sf소설계의 보물, 곽재식 작가님의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을 소개한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은 표제작을 비롯해 총 10편의 sf 단편소설이 실렸다. 한 편 한 편 모두 색다른 재미와 주제의식이 담겼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었던 단편소설은 '슈퍼 사이버 펑그 120분'과 '판단'이다. 



어느 날 회사에서 근무하던 김 박사는 "거기 회사에서 정보 이용 세금 처리 담당하시는 담당자분 맞으시죠?"라는 전화를 받는다. 사실 김 박사는 해당 업무 담당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그 즉시 업무 담당자로 '당첨'이 된 셈이다. 올해부터 신설된 구글세법과 망중립특례법으로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를 이달 말일까지 제출해야 하고 하필 김 박사가 전화를 받은 그 날이 말일이었다. 김 박사는 법령 위반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한다는 말과 보고서 마감까지 2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 출력을 위한 김 박사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회원가입이라니? 이런 게 필요해? 그렇지만 김 박사는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자기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하자. 회원가입. 하루 이틀 하는 회원가입도 아닌데. 어차피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의 일원인 이상 쓰잘데없는 웹사이트에 회원가입하는 일은 매일같이 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회원가입 또 하지 뭐. 익숙한 짓이다. 빠른 손놀림으로 가입하면 된다. 2, 3분이면 가입할 수 있을 것이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p.109



정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를 출력하기 위해서는 먼저 회원가입을 해야 했다. 그까짓 회원가입 2, 3분이면 될 거라 예상했지만 총 1시간이나 걸렸다. 보고서 출력을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을 때 연거푸 CyberX를 설치했고 몇 가지 오류 때문에 브라우저를 바꿔서 두 번 웹사이트에 접속했는데 아마 그때문에 CyberX가 동시에 실행되어 오류가 생긴 것 같닸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빌 게이츠인가 스티브 워즈니악인가 에이다 러브레이스인가가 말했다는 컴퓨터 작동 오류 해결이론의 제1원리가 떠올랐다. "껐다가 켜보든지." (푸하하하...)



보고서를 떼는 작업을 가로막는 관문이 여럿 있다면, 공동인증서 설치 작업은 마치 400년 전 울돌목 바다에서 일본군의 대함대를 홀로 막고 있는 충무공처럼 굳건해 보였다. 사람의 의욕에는 한계가 있고, 좌절감에는 끝이 없는 법 아니던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통과해서 보고서를 인쇄할 수 있단 말인가? 김 박사는 눈에서 조금씩 식염수와 같은 성분이라지만 그보다 훨씬 따뜻한 액체가 자기도 모르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p.125





제발, 제발! 아무리 21세기 첨단기술의 집약체라고 하는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군림하는 소프트웨어라 하는 공동인증서 프로그램을 쓰고 있다고 할지라도, 인간 본연의 원시적인 주술적 기대에 의지하는 심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고대의 어느 사냥꾼이 오늘은 산에서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물을 떠놓고 칠성님에게 빌듯이, 김 박사는 실리콘과 광케이블을 오가는 0과 1의 신호가 마법처럼 변하여 공동인증서 인식 프로그램 관리자 권한을 요구하지 않기를 빌었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p.125~126



과연 김 박사는 400년 전 울돌목 바다에서 일본군의 대함대를 홀로 막고 있는 충무공처럼 굳건해 보이는 공동인증서 설치 작업을 뚫었을까? 고대의 누군가 호랑이에게 물리지 않기를 칠성님에게 빌듯이 공동인증서 인식 프로그램이 잘 설치되도록 빌던 김 박사의 기도가 이루어졌을까? 결국 보 이용 세금 정산 보고서를 뗄 수 있었을까? 서류 하나 떼는데 수많은 'CyberX'를 수없이 설치하고 또 설치해본 사람이라면, 공동인증서가 마치 늠름하고 호기로운 충무공처럼 느껴진 적이 있다면 '슈퍼 사이버 펑그 120분'을 읽는 내내 엄청난 카타르시스와 빅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발에 채이듯 흔하디 흔한 소재로도 이렇게나 재미으면서도 그 안에 뼈 때리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애정하는 작가가 한 명 더 생겨 뿌듯한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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