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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 전면개정판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1년 12월
평점 :

문장들 사이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길함과 불안함은 말끔히 걷힐 마음도 그렇다고 시원하고 세차게 비를 내려줄 생각도 없는 변덕스러운 비구름처럼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오래된 기억을 더듬으며 그 조각을 좇고 좇아 이야기하는 등장인물들. 그들이 느리게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를 듣다 보면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 숨이 차는 듯했다. 불길하고 불안했지만 또 너무나 아름다웠던 <유지니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범인을 놓치기라도 할듯 마지막 페이지까지 세차게 읽어 내렸다. 하지만 마지막 단락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더 읽고 싶어졌다.
인근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는 한 명문가의 잔칫날, 그곳을 찾은 동네 사람들과 가족들은 누군가 보내온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마시게 된다. 노란 비옷을 입고 야구모자를 쓴 정체불명의 남자가 가져온 그 음료수는 열일곱 명의 희생자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만큼 치명적이었다. 그 사건의 생존자는 어렸을 때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그 집안의 소녀 한 명과 가정주부 한 명뿐이었다.
사건 현장에 도착한 형사는 싸늘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악의에 공포를 느낀다. 너무나도 작은 그를 짓눌러버릴 듯한, 확고하고 거대한 악의.(p.167) 기모노를 입은 여자, 셔츠 바람의 노인, 체격이 좋은 50대 남자들이 꼭 고고를 추는 듯한 자세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띤 채 쓰러져 있었다. 의자와 테이블을 차 넘어뜨리고 자신의 배설물로 범벅이 된 사람들의 온 몸에 고통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 사이에 이 모든 일에 초연히, 홀로 고상하게 서 있는 1인용 등의자를 발견한다. 질서를 잃은 방에서 홀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그 등의자, 그 의자에 앉았던 사람만은 무사할 것 같다는 그의 예감은 적중한다. 그리고 그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오사와 히사코를 보자마자 직감한다. 범인이 누구인지를!
형사는 그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오사와 히사코를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진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집집마다 하나쯤 있을 법한 스캔들이나 가정 내 불화 등 가족만이 연관된 뭔가도 없었다. 뭘 찾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희망이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미궁 속으로 빠져들던 수사는 사건이 발생한 인근 빌라에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밝힌 한 남성이 자살하면서 종결된다. 당시 그가 쓰고 있던 야구 모자와 비옷이 물적 증거로 나왔지만 그가 왜 독이 든 술과 주스를 아오사와 가로 가져갔는지 동기가 명확하지는 않았다. 진범이 따로 있을 거라는 의혹은 해소되지 않은 채 사건은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면한 사이가 마키코라가 여자가 당시 사건을 자세히 기록해 책을 출간한다. <잊혀진 축제>라는 이름의 픽션도 논픽션도 아닌 책. 사이가는 그 당시 마을의 생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녹취를 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기록했다. 하지만 책의 몇 가지 사소한 부분이 사실과 다랐다. 고의였을까? 그 책을 볼 누군가, 특정한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p.72)
사건 당시 초등학생이던 사이가는 그 사건에 관해 쓰는 걸로 그 사건의 존재를 인정하고,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범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범인을 향해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이야기를 써 전달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그 메시지를 알아 보았다...!
그러고 보면 책이 나오고 1년쯤 지나서 기묘한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었군요. (...)
귀사의 책을 읽었는데 혹시 작가는 사이가 마키코 씨 아닌가. 예전에 알던 사이인데 본인에게 연락을 하고 싶다. 그런 전화였어요.
<유지니아> p.293
<유지니아>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담긴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20년이나 지나 불분명한 기억들을 망각의 강에서 하나씩 건져 올리는 여러 명의 화자들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변질되고 왜곡된 진실을 사실이라 믿는 이들이 하나씩 꺼내놓는 퍼즐 조각들은 그런 이유로 서로 맞을 수가 없다. 그 퍼즐 조각들 사이로 벌어진 간극만큼 <유지니아>는 불길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또 그만큼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