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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지음, 김지현(아밀) 옮김 / 비채 / 2021년 11월
평점 :

"어두워지기 전에 올게요."오빠가 엄마에게 소리쳐 말했다. 그리고 문간에서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보더니 손인사를 했다. 이후로 나는 이 기억을 두고두고 되풀이해 떠올릴 것이다. 기억 속 오빠의 팔이 들려 올라가지 않을 만큼, 아니 우리가 애초에 작별 인사를 나누기는 했던지 의심될 만큼. <그날 저녁의 불편함> p.16
"어두워지기 전에 올게요." 하지만 집을 나선 맛히스 오빠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날씨가 풀려 약해진 얼음 틈으로 빠져 저수지의 바닥에 가라앉아 버렸다. "너희 형제가 죽었다."며 느닷없이 집으로 쳐들어온 동네 수의사 아저씨와 함께 들이닥친 상실과 슬픔은 손에 잡히는 대로 야스 가족의 모든 것을 부수어 버렸다. 맛히스가 죽었다는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야스는 개수대 옆 갈고리에 걸린 채 추위에 뻣뻣하게 굳어가는 수건들을 바라보았고, 엄마는 욕조 물 위에서 수건을 둥글에 말아 쥐었다. 동생 하나는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맛히스 오빠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하나는 응접실에 나와 있는 오빠의 관을 손마디로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만하면 됐어. 장난 그만 쳐, 오빠."
맛히스 오빠가 죽던 해 야스는 열 살이었다. 오빠가 죽은 뒤부터 코트를 벗지 않았고 똥을 누지 않았다. 야스는 그 무엇도 잃지 않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단짝 친구가 "너의 코트에서 젖소 냄새가 난다."고 말할 때에도 아빠가 코트를 확 태워버리겠다고 협박할 때에도 코트를 벗지 않았고, 배가 부풀어 가위로 배를 찌르는 것 같이 아파도 고통을 참았다. 야스의 엄마도 장남을 잃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고 곡기를 끊어버렸다. 몸은 날로 말라가고 퀭한 눈은 나날이 움푹 들어갔으며 "죽고 싶다"는 말을 계속했다. "죽고 싶어. 이만하면 충분히 살았어. 내일 내가 차에 치여서 로드킬당한 고슴도치처럼 짜부라진다면 기쁘겠어."(p.280) 벼랑 끝에 몰린 온 가족은 모두 위태로웠다.
엄마는 오믈렛을 덜면서도 나를 한 번도 만지지 않는다. 우연히 몸이 닿지도 않는다. 나는 한 발짝, 또 한 발짝 물러선다. 슬픔은 사람의 척추까지 올라온다. 엄마의 등은 점점 더 굽어간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 p.80
엄마는 남은 아이들이 비정상적인 행동을 계속 하는데도 그저 외면한다. 동물을 학대하고, 자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둘뿐이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을 읽는 동안 내내 바랐다. 엄마가 야스의 손을 잡아주길, 그저 한 번 세게 안아주길. 심지어 구제역이 발생해 기르던 소들을 살처분하기에 이를 때에도 아이들이 그 끔찍한 광경에 그대로 노출되는 사이, 엄마는 양손에 보온병을 들고 문가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저 그냥 서 있었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무거웠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게 너무도 고단하고 힘겨웠다. 읽다가 중단하길 수 차례, 하지만 끝까지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음과 상실이 만든 폐허 속에 야스만 홀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고 이 이야기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죽음이 가볍게 느껴질만큼 깊은 슬픔과 상처가 담긴 이 소설은 내내 차분하고도 순수한 목소리로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