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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평점 :
안간힘을 쓰지 않아도 그냥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과 울림을 주는 문장들이 있다. 투박한 단어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단순한 진심은 거창하고 유려한 문장에서는 만날 수 없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일상같은 편안한 문장들이라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들기 전까지 편한 친구의 이야기처럼 펼쳐 볼 수 있었던 <걷는 독서>는 박노해 시인이 풍경들과 책 사이를 유랑하면서 획득한 찰나의 순간들과 깨달음이 담겼다. 423개의 시어들은 때로는 잠언집처럼 나의 고민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기도 했고, 때로는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다가왔다.
길을 잘못 들어섰다고
슬퍼하지 마라, 포기하지 마라,
삶에서 잘못 들어선 길이란 없으니.
모든 새로운 길이란
잘못 들어선 발길에서 찾아졌으니.
<걷는 독서> p.320
살아있는 모든 것은
익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 속도로, 깊이깊이.
<걷는 독서> p.477
그야말로 우리는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책의 서문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적정한 정도의 침묵과 고독을 참지 못하고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고자 하고 타인의 인정을 구한다. <걷는 독서>는 더하기의 삶이 아닌 빼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엇을 가졌는지가 아닌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함으로써 반대로 우리가 가진 의미들을 증명해낸다. 길을 잃어 방황하거나 무엇을 잃어도 그것은 다 나름의 소용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한데.
<걷는 독서> p.725
서둘지 마라, 그러나 쉬지도 마라.
위대한 것은 다 자신만의 때가 있으니.
<걷는 독서> p.867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말, 위대한 것은 다 자신만의 때가 있다는 말. 그동안 다른 무언가가 되기 위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느라 지친 우리에게 너무도 필요했던 말이 아닐까. 세상 전체를 응축해낸 것 같은 문장들은 투박하지만 진심을 담아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어만져 주는 듯하다. 880 페이지에 달하는 <걷는 독서>는 박노해 시인이 20여 년간 쉼없이 걸어온 세상 그 자체이다. 유려하진 않지만 거창하지 않고, 투박하지만 온전한 진심이 담겼다. 무엇이든 넘쳐나 부족할 것이 없는 시대라지만 무엇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목마름으로 괴로운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걷는 독서>에 담긴, 애쓰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시어들을 읽다보면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잔을 들이킨 것처럼 머릿속이 점차 명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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