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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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대할 때면 늘 어디선가 보았던 젊은 시인의 수상 소감이 먼저 떠오른다. "자고로 시인은 울어야 한다, 우는 일은 몸과 마음을 다 쓰는 일이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울어야 쓰여지는 것이 시라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겠다 싶다. 시를 읽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던 나는 그 수상 소감을 읽고 나서는 왠지 시를 읽고 오독할 것이 두렵지가 않았다. 아침 저녁으로 스산한 공기 중에 시적인 서정이 둥둥 떠다니는 듯 느껴진다. 이런 날이야말로 시집을 들고 천천한 독서를 즐겨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시인 정호승 님의 시선집을 펼쳤다.

이번에 비채에서 펴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1973년 등단해 50년 가까이 시업을 이어온 시인 정호승 님의 대표작 275편을 엮어낸 선집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나는 세 편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하략)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의 시 '바닥에 대하여' p.216

🔖밤하늘은 자신의 가슴을 별들로 가득 채우지 않는다
별들도 밤하늘에 빛난다고 해서 밤하늘을 다 빛나게 하지 않는다
(중략)
누가 인생의 시간을 가득 다 채우고 유유히 웃으면서 떠나갔는가
어둠이 깊어가도 등불은 밤을 다 밝히지 않고
봄이 와도 꽃은 다 피어나지 않는다
별이 다 빛나지 않음으로써 밤하늘이 아름답듯이
나도 내 사랑이 결핍됨으로써 아름답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의 시 '결핍에 대하여' p.355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 중의 시 '술 한잔' p.202

인생은 나에게도 술 한잔 사준 적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하건 간에, 인생은 내 노력에 준하는 만큼의 결과를 안겨준 적이 없었다. 한때는 인생은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물을 부어도 차오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술 한잔'을 읽는 순간 인생이 나에게만 박한 것이 아니구나, 어쩌면 인생이란 게 원래 만만하거나 정다운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인생이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은 것 같아도 나를 닮아 사랑스러운 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인생은 술을 몇 잔이나 따라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 시어 하나 하나에 밑줄을 그어가며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받아 적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시인의 언어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우겨넣기만 하던 그때, 시는 그저 어렵고 낯설기만 했다. 가을과 겨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오는 지금 이 계절에도 시인이 몸과 마음을 다해 울어낸 시어들은 쉬이 읽히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을 두드리는 시 몇 편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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