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빅터 라발 외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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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년, 조반니 보카치오는 2,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흑사병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피렌체 외곽의 한 저택에서 시간을 보내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려주는 100편의 이야기를 담은 액자 소설 형식의 데카메론을 썼다. 2020년 3월, <뉴욕 타임즈> 편집자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의 팬데믹이 지구를 휩쓰는 동안 집필된 단편소설들을 한 곳에 모으겠다는 목적으로 앤솔로지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 <데카메론 프로젝트> 책 소개 중에서



확진자의 증가세는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세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등원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다. 안전 안내 문자는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엇을 하든 고민을 하고 결단을 내리듯 행한다. 먹을 것이 떨어져 마트에 가야 하거나, 아이들이 아파 병원 진료를 봐야 할 때에도 사람이 없을만한 시간을 예상해보고 계산한다. 이 시국에, 차로 24분 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한 모 호텔에서는 방역 수칙을 위반한 노마스크 풀 파티가 열렸다는 소식이 들린다. 9시 뉴스와 인터넷상으로 접한 그 파티의 사진에 마스크 없이 웃고 있는 그들을 상상한다. 머리가 멍해지다 일순간 그들의 얼굴에서 찢어진 입꼬리와 파르스름한 빛이 나는 소름 끼치는 눈동자가 보인다, 어디까지나 내 상상이지만.



사상 초유의 팬데믹 사태에 선 우리,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들은 초현실적으로 차이가 난다. 낮 기온 30도가 넘는 이 무더위의 날씨에 전염병을 막아내기 위해 최전방에서 두꺼운 방호복을 입고 애쓰는 의료진들이 있는가 하면 전국으로 유흥 원정을 뛰는 자들이 있다. 물론 방역 수칙을 지키지 않은 자들의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가능성이 높아져 '정의가 실현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에 대한 고통은 고스란히 의료진들에게도 전가된다. 집에서 운둔 생활을 하다 어쩌다 '재수가 없어' 그런 자들과 동선이 겹친 무고한 시민들에게도 말이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미 봉쇄는 3개월째 접어들었고, 필라는 특유의 장난기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말했다. "화면은 우리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을 갖게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야.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났지. 나머지 우리는? 우리는 버려졌어." 그녀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왜 아닌 척하는 거야?"- <데카메론 프로젝트> - 알아보다 p.27


주인공인 '나'가 살고 있는 포트 워싱턴 애비뉴 180번가의 6층짜리 공동주택은 바이러스로 인해 텅 비어 버렸다. 별장이나 도심 외곽의 부모님 집, 혹은 병원으로 모두 떠나 버렸다. 그곳을 지키는 것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건물 관리인 안드레아와 나, 필라 외 몇 사람뿐이다. 안드레아는 감염 취약 지구들에 위치한 모든 아파트를 점검하라는 시의 요청에 매일 아파트를 돌며 거주민들의 안부를, 어쩌면 생존을 확인한다. 매일 모든 집의 현관문을 두드릴 것이고 대답이 없을 시 방문을 따고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안드레아가 밖에서 문을 노크하면 '나'는 안에서 방문을 노크한다.


41호에 사는 필라는 바이러스로 인해 직접 대면이 불가능해지기전까지 아파트에서 시간당 35달러에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왔다. 봉쇄 3개월째, 필라는 절망에 빠져 버렸다.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났지. 우리는 버려졌어. 왜 아닌 척하는 거야?"라며 일갈한다.



"힘든 한 해를 보내셨군요. 안 그런가요?" 당신은 아파트에서 혼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본다. 섬처럼 고립된 소파에 누워 몸을 떠는 모습. 불덩이 같은 몸. 눈에서 눈물이 솟구칠 때 마치 익사하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는 모습. "우리 모두 그랬잖아요?" - <데카메론 프로젝트> 이처럼 푸른 하늘 p.35

오늘은 주인공 '나'의 생일이다. 그녀는 어둠의 경로를 통해 봉쇄조치에도 불구하고 문을 연 시내 중심가 펜트하우스의 스위트룸에서 피부 관리를 받는다. 검은 정장에 머리를 뒤로 넘겨 바짝 틀어올린 페이셜리스트는 기억과 피부는 함께 간다고, 기억이 좋으면 피부도 좋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힘든 한 해를 보내셨군요. 안 그런가요?"라고 덧붙인다. 그리곤 피부에 해악을 미치는 나쁜 기억 제거하기 위한 시술을 진행한다. 기억이 뿌리째 뽑혀버린 주인공은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은채 택시를 타고, 공원으로 가 전 남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사랑스러운 컵케이크를 베어문다.


안 됩니다, 여러분은 격리실을 떠날 수 없습니다. 밖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아니지만 여러분에게 너무 위험할 겁니다. 우리 행성에는 그런 종류의 미생물이 없습니다. - <데카메론 프로젝트> -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p.100


사실은 아직도 믿기 어렵다. 밖에는 위험한 전염병이 돌고 있고, 백신은 턱이 없이 부족하다. 편도선이 잘 붓는 첫째 딸아이는 편도 염증으로 열이 나면 소아과가 아닌 응급실의 밀폐된 공간에서 방역복을 입은 의사 선생님께 진료를 보아야 한다. 가끔 아파트 주차장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는 구급차가 정차하고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내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던 모습을 창 밖으로 본 적도 있다. 허구가 아닌 진짜 100% 현실 그 자체인 팬데믹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데카메론 프로젝트>에 실린 29편의 이야기들은 전염병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다. 그 무엇도 팬데믹 시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는 못하지만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일 투성이인 이 파국적 팬데믹 시대에 만연한 불안과 공포의 분위기를 잠시라도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것은 상상력이 가능한 이야기뿐이다. 700년 전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의 <데카메론>이 그랬듯 어려운 시기에 소설을 읽는 것은 그 시기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면서도 버텨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준다는 걸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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