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킬
아밀 지음 / 비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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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헤어스타일이 '숏컷'이라는 이유 때문에 페미니스트라 지목당하고 혐오 받아야 하는 곳에서 '곤경에 빠진 슬픈 처녀'들을 구해내는 글을 써왔고 또 앞으로도 써내겠다고 당당히 천명하는 이 소설, 소름 끼치도록 멋지고 또 아름답다. 유약하고 다소 의존적인 이미지로 박제된 '소녀'들은 기꺼이 모험을 껴안고 운명에 순종하지 않는 아밀의 '소녀'로 재탄생한다. 이 책은 표제작인 <로드킬>을 비롯해 총 여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어있고 나는 '오마이걸'에게 헌사한 <로드킬>에 대해서 소개해보고자 한다.

🔖정부에서는 우리를 소수인종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공식 분류는 '1급 보호 대상 소수 인종'으로, 인류 문명 전체의 공익을 위해서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인종이라는 뜻이다. 즉 머지않은 미래에 멸종해버릴 거라는 뜻이기도 하다.
<로드킬> p.13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미래의 사회, 소녀들이 갇힌 보호소가 있다. 그 미래사회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이 편의와 힘을 위해서 자궁을 버리고, 유전자를 변형하고, 줄기세포를 이식받아 자신의 딸들에게 새로운 유전자를 남겼다. 그렇게 그들이 새롭게 진화한 인류의 조상이 되는 동안 진화에서 도태된, 아니 진화를 '살 수 없는' 가난한 여성들이 낳은 여성인 개체들은 태어나자마자 이 보호시설에 입소하게 된다.


소녀들은 자신들이 보호소 바깥세상에선 하루도 못 가서 살해당하거나 마구잡이로 강간당할 위험에 처해질 연약한 존재라고 교육받고 세뇌 받는다. 높은 철책과 콘크리트 담장으로 철저히 둘러싸인 보호소는 바깥 세상과 완벽히 차단된 세상이다. 철책 바깥은 바로 고속도로다. 밤낮없이 맹렬히 달리는 자동차의 소리만이 보호소로 유입되는 유일한 외부 감각이다. 보호소의 소녀들은 보호소 밖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볼 수 없이 폐쇄된 공간에서 자란다. 그들에게 보호소를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목숨을 걸고 몰래 담을 넘거나 졸업시험에 합격하는 것 뿐이다. 졸업시험이란 보호소를 찾아온 인간 남성에게 선택받는 것, 그리하여 그와 결혼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깥세상으로 탈출하게 되는 동시에 한 남자에 구속된다.

주인공 '나'는 탈출을 꿈꾼다. 보호소 구석구석 둘러보며 철책, 담장, 감시 카메라, 보안 시스템, 잠금장치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탈출 작전을 짜기를 반복하고 탈출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졸업시험을 하루 앞두고 보호소 소녀 중 '졸업시험'을 가장 고대하는 듯 보였던 시윤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연히 엿듣게 된 시윤의 죽음, 시윤이 탈출을 감행하다 고속도로에서 '로드킬'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친구 '여름'과 탈출을 감행한다. 천신만고 끝에 당도한 고속도로의 한쪽 끝, 매섭게 달리는 차들을 아연실색하여 바라보는 주인공은 고라니 떼를 발견한다. 여느 사슴과 달리 수컷임을 상징하는 왕관과도 같은 뿔이 수컷과 암컷 모두에게도 없는 그들. 산에서 막 내려온 그들은 자기 집 거실에 깔린 융단에 걸음을 내딛는 사람들처럼 가뿐하게 도로로 진입해 유유히 걷기 시작하고 차들은 일제히 멈춘다. 주인공과 여름은 고라니와 함께 고속도로를 건너 탈출에 성공한다.

보호소의 소녀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된다. 인간이라면 가져야할 모든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객체 보존'이라는 미명아래 모든 권한을 거세 당한다. 안전한 구속을 택할 것인가 그 무엇도 안전하지 않은, 아니 그 무엇도 어떤지 알 수 없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주인공과 여름은, 어쩌면 애초부터 무엇을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저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회의 규범이 박제해버린 '소녀'라는 틀을 던져버린 것일뿐.

정교하게 직조된 이야기들 끝에서 나는 그 '소녀'들은 곧 나라는 것을, 우리들의 모습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인식도차 못한 사이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 독보적인 이야기를 통해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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