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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리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평점 :

유려하고 섬세한 문장들, 그 안에서 점점이 흩어지는 농도 짙은 고독감과 허무. <산소리>를 읽는 내내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이 홀로 산을 마주 보는 아름답지만 조금은 기묘한 분위기의 수묵화 한 폭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만년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산소리>로 서정의 절정을 만나보았다.
예순둘이 된 초로의 노인 신고, 기억력 감퇴와 급작스러운 각혈 등 본인조차 인식하지 못한 사이 그는 죽음의 문턱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야스코와 결혼해 슈이치와 후사코 두 자녀를 두었고 모두 출가해 가정을 이루었다. 남들이 보기엔 더없이 안정적이고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허무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엉망인 삶이었다.
8월이 되려면 열흘이나 남았는데도 가을벌레가 울고 있었다.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밤이슬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문득 신고에게 산소리가 들렸다.
바람은 없다. 달은 보름달에 가깝게 밝지만 작은 산 위를 수놓은 나무들의 윤곽은 습한 밤 기운으로 희미해진다. 그러나 바람에 움직이지는 않았다.
<산소리> p.20
전쟁에서 돌아와 폭력적인 성향이 되어버린 슈이치는 기누코라는 전쟁미망인과 불륜 관계이고, 딸 후사코는 자녀를 둘이나 낳았지만 짐을 싸 아예 친정으로 들어와 버린다. 사위 아이하라는 마약 중독과 사업 실패로 막다른 지경에 몰려 다른 여자와 자살시도까지 하지만 여자는 죽고 아이하라는 살아남는다. 신고는 자신이 자식들의 불행을 방관했다고 자책하고 그 누구의 행복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회한에 사로잡힌다. 그러던 어느 날, 신고는 '산소리'를 듣는다. 아득한 바람 소리 같기도 땅울림 같기도 한 기묘한 소리를 듣고 난 신고는 악귀가 자신의 임종을 예고한 것이라고 짐작한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죽기 전에 '산소리'를 듣는다는 미신이 있다고 한다. 임종이 가까워올수록 신고는 청년 시절에 몰래 흠모했던 여인인 야스코의 언니에 대한 기억을 더 자주 떠올리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신고는 며느리 기쿠코를 아끼면서도 아들의 불륜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아들이 다른 여자와 불륜 관계에 있는 사이 며느리 기쿠코와 불륜녀 기누코가 차례로 임신을 한다. 며느리는 이 상황이 치욕스럽다며 임신중절수술을 하고 불륜녀 기누코는 아이를 낳겠다고 한다. 인생이란 게 늘 그렇듯, 말끔히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천 년이든 오만 년이든 연꽃 씨앗의 생명은 길구나. 인간 수명에 비하면 식물의 종자는 거의 영원한 생명이나 다름없네. (......) 우리들도 지하에 천 년이나 이천 년 정도 묻혀서 죽지 않고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 무덤이 아니고 말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쉬는 거야. 정말로 땅속에라도 묻혀서 쉴 수 없는 것일까. 오만 년이 지나서 일어나면 고민도 사회적 난제도 완전히 해결되고 세계는 낙원이 되어 있을지도 몰라.
<산소리> p. 379
신고는 번잡스러운 자신의 삶을 바라보다 땅속에 묻혀 오래도록 생명을 잉태한채 죽음과 같은 휴식을 갖는 연꽃을 부러워한다. 인간의 유한하고도 짦은 생에 비하면 천 년이상을 사는 연꽃의 생명은 영원하다 느껴지기도 한다. 며느리가 가진 아이는 사라졌지만 불륜녀 기누코는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 또 자살 시도를 했던 사위 아이하라는 어딘가에 생존해있다. 신고는 자신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모르는 핏줄이 세상 어디엔가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은 다소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딸 후사코는 이혼했지만 언제든 아이하라와 재결합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고는 가족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다함께 단풍 구경을 가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엉망진창인채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그래야만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