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은 봄밤 - 교유서가 소설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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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소설만은 쓰고 싶었다. (중략) 다시는 일어설 수조차 없고 매 순간 꿈찍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소설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돌이킬 수 없이 낡아버렸다 해도, 아직은 봄밤이다.

<그래도, 아직은 봄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의 곳곳에 새겨진 너무도 생생하고 현실적인 고통들을 마주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피가 낭자한 참혹한 현실일지라도, 그래도 이 삶을 살아내야만 한다고 그악스럽게 말하는 이 소설은 읽을수록 내가 잊었던 힘이 생겨나게 했다.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은 작가가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통 속에서 치열하게 직조해낸 이 이야기들은 생을 놓아버리고 싶을만큼의 고통 속에서도 끝내는 살아남은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놓쳐버린 미래를 생각해. 우리가 지워버린 과거를 생각하고 대책 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당신은 왜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나는 왜 그때 도망치지 않았다 생각하고 당신은 왜 더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내지 않았는지 생각하기도 해.

<매듭> p.33


윤은 빙벽등반 도중 추락사고로 경수와 흉수가 손상돼 전신 마비가 되었다. 수저를 들지도,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는 상태인 윤은 매번 로프를 찾았고 매듭을 지으려고 했다. 윤이 결국 지으려던 매듭은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



윤과 결혼을 약속하고 미래를 계획하던 '나'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한지도 모른 채, 윤과 혼인신고를 하고 그를 부양한다. 그녀는 생계를 잇기 위해 중국산 낙지를 수도 없이 자른다.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가 끔찍한 고통속에서 익힌 채 가위로 잘려지는 낙지를 보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끔찍한 고통 속에 있었을 그가 통증과 함께 지속되는 삶과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죽음 중 무엇을 선택했을지를 생각한다. 그리고 윤을 떠올린다. 놓쳐버린 미래와 지워버린 과거, 그리고 대책 없이 무너져내리는 현실을.



용서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놈의 거대한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해도 조금도 시원해질 것 같지가 않은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난 틈만 나면 용서를 이야기했다. 자격이 없기는 놈이나 나나 마찬가지일 텐데도 할 수만 있다면 그만 놓여나고 싶었다.

<어떤 이별>p.80


'나'의 삶이 산산조각이 나 부서지게 된 것은 이웃의 정신 지체 장애인이 다섯 살 난 아이를 아파트 난간으로 던져버린 탓이었다. 그녀는 추락하던 그 순간 아이의 눈에 머물던 두려움과 혼란을 잊지 못한다. 그 녀식을 찢어발기는 악몽을 꾸며 잠을 깨면 또 다시 악몽같은 현실의 연속이다. 깨져버린 수족관처럼 생명을 가진 것들은 모두 꺼내어져 죽어버렸고 그녀의 과거와 미래를 통째로 잃어버렸다. 정 잊지 못하겠다면 복수를 하라는 K의 말에, 그녀는 날카로운 칼을 가방 속에 넣고 어디론가 숨어버린 아이를 던진 지체장애인과 그의 모를 찾는다. 복수를 결심하고 난 후 그녀는 처음으로 단잠을 잔다. 결국 칼은 휘두르지도 못한 채 칼날을 꽉 쥐기만 한 그녀 손에서 피가 눈물처럼 철철 난다. 골목 한 귀퉁이를 향해 칼을 던져버리곤 말한다. "나도 그냥 살아가겠죠. 끊임없이 기억하고, 증오하고, 자책하며, 하지만 질기게."(p.105)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되면 거리 곳곳이 밝아진다. 전신 마비의 윤을 평생 돌보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도, 연상 누나의 애완 동물(?)로 전락해버린 사람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매 해 봄은 기어코 찾아 온다. "그래도, 아직은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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