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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지나북스 / 2021년 5월
평점 :

나에게 두 번째 생이 주어진다면 자유로이 부는 바람처럼 세상 곳곳을 유랑하고 싶다. 그 어떤 것에도 속박당함 없이 자유롭게 떠다니며 세상의 숨겨진 천국을 하나씩 발견하고, 풍요롭고 너그러운 대자연 안에서 완벽한 행복감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또 다른 방랑자를 우연히 만나 운명처럼 사랑하고 그로 인한 삶의 변주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싼마오처럼 말이다. 표표한 눈으로 세상을 노려보는 듯했지만 그 누구보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이를 대했던 그녀, 늦가을 보리밭에 홀로 선 허수아비의 모습 같아, 이 책의 제목이 퍽 가슴에 와닿는다. 배고픈 참새들이 종종 거리며 보리밭을 쪼아대도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을 허수아비 싼마오의 세상을 향한 애정이 담긴 <허수아비 일기>, 대서양의 에메랄드 같은 아름다운 바다 곁에서 펼쳐지는 싼마오와 호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산자락의 하얀 단층집, 그곳에 사는 오지랖 넓은 싼마오와 단순, 무식, 과격의 대명사 호세가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었다. 몸이 불편한 노인을 보면 차를 세우고 기어이 태워 목적지에 모셔다드려야 직성이 풀리는 싼마오와 스페인 땅에 왜 스페인 언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들만 사냐며 울화통을 터뜨리는 호세, 전혀 어울리는 구석이 없는 커플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마음만은 진심인 천생연분인 둘은 적당히 거리를 지키며 그들만의 방식대로 사랑을 했다.
이따금 찾아드는 고독은 나라는 인간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다 열지 않았다. 호세는 내 마음속의 방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앉아 있기도 하고 심지어 한자리 차지하기도 했지만, 나는 나만의 구석 자리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것, 나 혼자만의 것이었다.
<허수아비 일기> p.271
호세는 왜 바다 밑에서 일하는 직업을 선택했을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호세는 바다를, 아무도 없는 바닷속 세상을 열렬히 사랑했다. 호세는 땅 위에서는 외롭고 서글퍼도 물속에서는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다. (중략)
"싼마오, 물 밑에 길이 하나 있어. 깊은 바다로 통하는 길인데 그리로 들어가면 햇빛에 비쳐 떠다니는 해초만 보여. 알록달록 빛나는 게 꼭 보석 같아. 신선이 사는 세상처럼 아름다워. 당신도 같이 보면 얼마나 좋을까."
바닷가로 올라와 햇볕에 몸을 말린 호세는 또다시 그의 꿈속 세상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허수아비 일기> p.229
어느 날 싼마오가 느닷없이 호세에게 "다음 생에서도 나랑 결혼할래?"라고 물었을 때다. 로맨틱과 전혀 거리가 먼 호세는 "천만에!"라고 대답했고 아마 그 뒤로도 싼마오는 듣고 싶었던 대답인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결혼할 거야."라는 말은 결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둘은 지금 이 세상에서나 더욱 아끼며 잘 살자며 서로의 공간을 더욱 존중하며 훨씬 즐겁고 신나게 하루하루를 살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허수아비의 일기>는 끝이 난다. 싼마오의 일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 뒤로 호세가 잠수일을 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고, 대만으로 돌아가 지내던 싼마오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던 싼마오와 호세는 서로를 만난 탓에 세상에 발을 딛고 뿌리를 내리게 되었을 테고 그 덕분에 이렇게 활기 넘치는 싼마오의 일기를 읽게 되었을 테지. 사고가 아니었다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백년해로했을 백발이 성성한 싼마오와 호세 이야기가 참 아쉽다. 이렇게 명랑하고 활기 넘치는 싼마오의 일상을 읽으면서도 가슴 한 켠이 아릿한 것은 아마 그 때문일까. 호세는 다음 세상에서는 싼마오와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왠지 둘은 어디선가 티격태격하며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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