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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지금, 이곳이 완벽한 순간과 장소라는 생각. 이 순간이 우리에게 속해 있고 우리가 이 공간에 속해 있어. 완벽한 하루야."
<부서진 여름> p.11
행복의 정점에서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주인공 한조, 쐐기화의 거장으로 거듭나 화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고 그가 태어나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낙인과 함께 쫓겨나듯 등졌던 도시, 이산시의 모든 이가 우러러보는 존재가 된 그, 그의 인생은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던 바로 그때부터 마구 뒤틀리고 흔들리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무엇이었을까. 그의 인생에 균열이 야기한 것이. 그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렇다고 정면으로 직면하기도 힘들었던 과거에 다가선다. 두 가정을 파괴시키고도 남은 생존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버린, 그 누구도 봉인한 적이 없지만 봉인된 비밀. 이십오 년 전 한 소녀가 실종되고 죽은 시체로 돌아온 그 사건을 떠올린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낙인을 짊어진 채 고행과 같은 삶을 살아온 한조와 그 낙인을 벗어던지기 위해 분투해온 수인,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였지만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사뭇 달랐다. 한조는 재능이 있음에도 오래도록 무명화가로 암흑같은 나날을 보낸다. 사랑했던 그 소녀가 죽음을 맞은 후부터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러다, 김수진을 만난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은 해리, 이십오 년 전 사체로 발견된 지수의 동생이다. 가족을 잃은 고통을 온 몸에 자해를 함으로써 고통으로 고통을 잊어왔던 해리, 그녀는 생물학적으로 성장했다기보다 비극적 사건과 기억의 거푸집에 의해 주조된 존재(p.177)였다. 그녀의 상처를, 고통스러운 기억의 흔적들로부터 예술적 영감을 얻어 한조는 가혹한 삶의 흔적을 온몸에 새긴 그림 오필리아를 완성해낸다.
한조의 삶 곳곳에는 해리가 존재했다.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한조는 해리가 돌아오길 바랐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수의 죽음에 얽힌 봉인된 비밀을 풀어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한조는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잔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역시, '이정명'은 '이정명'이다. 소설의 중반부부터 누군가를 향해가던 화살은 돌연 멈춰서 방향을 바꾼다. 예상치도 못했던 곳으로 몸을 돌려 향해가는 화살은 과연 누구 앞에 멈춰설 것인가! 마지막 엄청난 반전을 만난 순간 책 속의 활자들이 뒤틀리는 듯 보였다. 작가 이정명이 차곡차곡 정교하게 쌓아올려 견고하게만 보였던 하워드 주택이, 묘하게 몰아가던 범인에 대한 의구심과 환멸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완전히 부서져내렸다. 정말로 후텁지근해 숨 막히는 여름이라는 한 계절이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두 손으로 간신히 책 양 날개를 부여잡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내렸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