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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시처럼 아름다운 서정적 묘사 뒤에 곧바로 따라오는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의 서사. 잔인한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옌련커의 이야기는 그런 연유로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다. 현실 속 실제 존재하는 부조리한 이야기들은 그의 치밀한 문장 속에서 더욱 사실적으로 직조되어 우리의 폐부를 깊숙이 쑤셔댄다. 엄청난 폭발력과 흡입력을 가진 옌롄커의 문장들 사이로 보이는 가혹한 현실,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은 악전고투하며 그 나름의 방식으로 꾸역꾸역 삶을 살아낸다. 이 책의 표제작인 <연월일>의 셴 할아버지와 <골수>의 요우쓰댁이 바로 그들이다.
"태고 이래 최악의 가뭄이 덮쳤던 그해에는 세월도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손으로 슥 문지르면 세월은 재처럼 손바닥 위 타버린 자리에 들러붙었다.
<연월일> p.14"
최악의 가뭄이 마을을 덮쳤다. 비는 전연 올 생각을 하지 않고 먹을 물과 식량 역시 바닥난 어느날,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잘 보관해둔 옥수수 종자를 땅에 심어 가을 파종을 한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고 뜨거운 해가 산등성이를 매섭게 달구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마을 사람들은 지독한 가뭄을 피해 피난을 가기로 결정한다. 그해 일흔두살인 셴 할아버지는 자신의 노쇠한 심신으로는 피난을 가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마을에 홀로 남는다. 바러우산맥 아래 모든 마을을 통틀어 남아 있는 사람은 일흔둘의 노인 하나와 눈 먼 개 한마리.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 갚은 그의 온몸 뒤로 내려앉았다.(p.19)
홀로 남은 셴 할아버지는 자신이 심은 단 하나의 옥수수에 싹이 난 것을 발견하곤 목숨을 다해 그것을 지킨다. 옥수수 옆에 사다리 네 개를 묻고 풀로 지붕을 엮어 임시로 지낼 거처를 지어 밤낮으로 옥수수를 보살핀다.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눈 먼 개는 마을 사람들이 파종한 옥수수 종자가 그득한 쥐구멍을 발견해냈고 셴 할아버지는 그것으로 연명하며 옥수수를 보살핀다. 옥수수 종자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셴 노인만은 아니었다. 엄청난 쥐 떼 역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할아버지의 옥수수의 싹과 줄기를 갉아먹고 우물물마저 모두 마셔 버린다. 마을의 유일한 우물물조차 말라버리고, 옥수수 종자까지 바닥나 버린 최악의 상황에서 셴 할아버지는 옥수수를 지켜낼 수 있을것인가?
"먹어도 괜찮아. 그걸 먹었으니 앞으로 다가오는 세월에는 네가 나를 밥으로 생각하고 옥수수 옆에 살아 있거나, 아니면 내가 너를 잡아먹고 저 옥수수 옆에 살아 있거나 하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셴 할아버지는 생각했다. 결국 내가 이 말을 너에게 하고 말았구나, 장님아. 아주 오랫동안 나는 너에게 이 말을 할 기회를 찾지 못했어.
<연월일> p.129
지독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셴 할아버지와 눈 먼 개가 단념하지 않고 살아내고자 악전고투하는 모습은 너무나 참담해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고통과 절망이 없이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옌롄커는 고통과 절망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삶의 고통과 절망, 인간의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끝내는 이야기한다.
이 책에 실린 표제작인 <연월일>을 비롯해 <골수> <천궁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은 모두 옌롄커 본인이 선별해낸 것이라고 한다. 삶이라는 것 자체에 넌덜머리가 날 것만 같은 이런 삶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는 옌롄커의 인물들, 고통과 절망으로 점철된 고단한 삶 앞에서도 의연하고 담대한 그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연월일>, 이 단 한권의 책만으로도, 왜 세상이 옌롄커 그를 가리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라고, 현대 중국 문학의 거장이라고 일컫는지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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