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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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바짝 쫓아온 게 보여. 하지만 죽음보다 항상 더 빨리 달리기만 하면 돼. 서 있으면 가라앉고 부패한다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야 해.
<여행자> p.209"

4만 마르크를 품에 안은 채, 끊임없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자가 있다. 베를린에서 함부르크, 함부르크에서 베를린, 베를린에서 도르트문트, 그리고 다시 아헨으로. 끊임없이 철도를 따라 이동하는 듯 하지만 그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붙어 있다.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안전함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열차에서 내리는 그를 또 다시 사로잡는 것은 걱정과 절망. 그는 또 다시 기차표를 발권하고 목적지가 없는 여행을 시작한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베커 고철 주식회사의 사장이었던 오토 질버만은 베를린에서 기반을 다지고 가정을 일구며 살아가던 여느 시민과 다름없었다.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자, 범죄자와 시민 그 옅은 구분선 바깥으로 그의 등을 떠민 것은 바로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베를린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던 평범한 시민이었던 그의 인생 이십년은 범죄자라는 낙인만 남은 채 텅 비어 버렸다, 열차의 차표와 상실한 것들의 목록을 제외하고.

그렇다. 오토 질버만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살던 집은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었고 회사는 동업자이자 친구였던 독일인에게 강탈당한 채 일부의 투자금만을 돌려받았다. "지금 사람들이 유대인에게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거 아닌가요?"라고 묻는 오토의 아내에게 한 독일인이 대답한다. "세상에는 사악한 일이 많이 벌어집니다. 좋은 일도 많고요. 어떨 때는 이 사람에게, 어떨 때는 저 사람에게 말이지요. 어떤 사람은 폐결핵 환자고, 또 어떤 사람은 유대인이이에요.(p.30)"

"내 권리 전체를 빼앗은 사람들에게 도난신고를 하려는 게 아마 유대인 농담인지도 모르지요. 당신이 도둑은 찾지 않고, 도둑맞은 사람에게 뻔뻔한 말을 하는 게 독일 현실입니다. 이봐요, 경감님, 나는 돈을 찾고 싶어요.
<여행자> p.349"

그는 살고 싶었다. 끊임없이 기차를 타고 이동하며 낯선 지역에서 월세방을 계약하기도 하고 국경을 넘으려는 시도도 하며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남은 돈은 3만1천 마르크, 이동하는 열차의 객실안에서 잠깐 잠든 사이 그는 그마저도 모두 도둑맞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들어가 사건 접수를 시도한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재산을 뺏고 체포하는데 혈안이 된 독일 경찰들에게 전 재산을 도둑맞았다며 도난 사건 접수를 요청한다.

"나는 이제 권리가 없어. 하지만 그저 이성과 습관 때문에 나에게 아직 권리가 있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 나는 사실 그들이 없애려고 하는 기억 덕분에 존재하는 거야. 사람들은 나를 잊었지. 나는 이미 강등됐는데, 그 강등이 아직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야.
<여행자> p.19"

 독일의 시민이었던 오토 질버만은 유대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범죄자로 '강등'되어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도주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 베를린을 떠나려 했지만 어느 새 또 다시 베를린을 향하고 있는 오토 질버만, 문이 굳게 닫힌 독일안에서 달아날수록 제자리였다. 한 곳에 서서 대재앙이 자신의 몸을 옥죄어오는 것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는 또 다시 여행을 떠나는 수밖에 없다. 그는 떠날 수 없는 여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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