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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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결심을 하면서 혼자 재미있었다.

<겨울장면> 밖 p.174"


요 며칠 <겨울장면>에 대해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생각했다. 활자 사이로 둥둥 떠다니는 R의 기억 조각들을 건져 올려 퍼즐을 맞추듯 '겨울장면'을 완성해보려 했다. 무엇인가, 내가 놓친 것이 있을까 페이지를 다시 넘겨보기도 하며 R과 아내의 행방을 쫓았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끝없이 배회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쓰고 싶은 말들은 단 한 글자로 쓰지 않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어쩌면 속임수같은 말장난에 빠져버렸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무엇이 속임수이고 무엇이 아닌지 나는 또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고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기억의 편린들, 툭툭 끊어지다 말장난하듯 이어지는 이야기들, 그 속에서 무력하지만 거세게 분노하는 R이 주인공이다. 추락사고 후 그의 기억들 대부분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무엇이 사라지고 남은 것인지, 또 사라지지 않고 남은 기억들은 자신의 것이 맞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다. 직장 동료 L의 장례식에 함께 다녀온 후 아내는 카레를 만들었다. 집 안 곳곳에 카레 냄새는 남아 있지만 아내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R은,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겨울장면> p.13"


R과 아내는 휴가를 위해 아내의 고향이자 작명 여행지로 유명한 제인해변을 찾는다. 그곳에서 세꼬시와 소주를 마시고 함께 해변가를 산책하다 바다에까지 들어가 걷는다. 이윽고 차가운 모랫바닥에 뺨을 대고 엎어진 채 눈을 뜬 R, 아내가 옆에 없다. R이 아내를 버린 것인지, 아내가 R을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R은 그냥 걷는다. 작명 천막에 들어가 작명을 하고 모텔에서 잠깐 눈을 붙인다.


"내가 바라는 건 절대 이루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결국 이루어져. 원하는 반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정확히 내가 바라는 것과 반대로. R이 여자에게 상체를 기울이고 말한다.

<겨울장면> p.102"


어느 날부터 천천히 아내의 옷이 장롱 안에서 사라지고, 아내의 모든 책이 책장에서 사라진다. R은 아내의 마지막 얼굴을 기억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R은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당신이 내 불행을 빌어주면 나는 행복해지는 건가요?"라고 R에게 묻는 여자. R이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이 호수 둘레에 서서 하는 마지막 결심.

그건 결심이 아니다.

어떤 마음도 아니다.

다 지나간 후, 이미 끝난 것이다.

끝난 것을 끝내려는 것이다.

<겨울장면> p.131"


R은 제인호수에 서서 아내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린다. 맥락없이 이어지는 파편같은 문장들은, R이 기억과 망각이 공존하는 어떤 공간에서 얼마간의 삶과 얼마간의 죽음을 느낀다는 것 외에는 아무 단서도 주지 않는다.


'하하하하' 웃으며 등장하는 작가임직한 어떤 목소리가 '현실, 리얼, 팩트 그러니까 현실은 현실이고 리얼이즈팩트, 팩트이즈팩트'(p.122) 라고 외치기도 하고 아직 소설의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며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글이라고 불러야 할지, 이 미친, 이라고 불러야 할지'(p.152)도 모르겠다고도 외친다. '육체가 한계라는 생각이 한계'(p.122)라며 소설이 가져야함직한 모든 한계를  허물어버리며 끝나는 이 소설,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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