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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ㅣ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1
나태주 엮음 / &(앤드) / 2020년 10월
평점 :

미사여구가 가득한 화려한 글보다 투박하면서 간결한 말 한마디가 나를 울릴 때가 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이가 쓴 글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더 마음이 와닿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는 아마도 그런 숨은 보물같은 시들을 모아 엮은 것 같다.
죽음의 문턱에서 시인 나태주를 안아주고 일으켜준 국내시 114편이 담긴 이 시집에는 제목만 보아도 우리가 알만한 유명한 시들도 있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처음보는 낯선 시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낯설음 뒤에 밀려오는 벅찬 감동과 여운은 마음 곳곳을 가닿아 흔적을 남긴다.
<딸을 위한 시> - 마종하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지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하라고.'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p.234
책의 목차에서 제일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시는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이다.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언어로 쓰여진데다 그 안에 담긴 뜻은 더없이 깊고 따스하다.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언젠가 나의 아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시이다.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는 나태주 시인의 이야기는 더 따스하다. '시의 내용이나 수사가 그다지 화려하거나 대단하지도 않다. 다만 평범하다. 그러나 그 평범 속에 원대한 진리를 담고 있다. 자식을 가르치고 세상을 대하는 시인의 매우 특별하고도 사려 깊은 안목과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p.235)'
<내 마음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후략)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p.74
'내 마음 아실 이' 이 시의 제목이자 첫 문장을 여러 번 읊조려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멋진 첫 문장이 나올 수 있었을까? '시에서 첫 문장은 신이 주시는 선물이다(p.75)' 는 나태주 시인의 말처럼 신이 주신 첫문장이라고밖에는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없을 듯하다.
나태주 시인이 말한 바처럼 시의 멋진 첫 문장을 써내는 것은 신이 주시지 않는다면 더없이 어려운 일이지만 이는 비단 시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의 주인공 피에르 굴드가 완벽한 첫 문장을 찾지 못해 첫 문장을 공백으로 남겨두고 두번째 문장부터 써내려가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히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이다. (<고래>의 첫 문장),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 (<무진기행>의 첫 문장)처럼 쉬이 읽히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쓰지는 못했을 문장들을 읽어보며 마음의 호사를 부려보기도 한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의 시구를 적어 노트북곁에 붙여두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고 <대추 한 알>이 내게 가만히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당신이 하는 일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당신이 열심히 읽고 쓰는 일이 언젠간 둥글고 붉은 대추처럼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시인이 어렵사리 첫 문장을 써내듯, 나 역시 언젠가는 내 인생의 첫 문장을 쓰게 될 날이 오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