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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나는 아무 사전정보 없이 책 읽는 것을 즐긴다. 호기심으로 바짝 곤두선 나의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책을 탐색하며 책에 쓰여진 모든 것들을 날 것 그대로 받아들인다. 책이 주는 감정에 푹 빠져 유영하다보면 책 역시 나를 아무 조건없이 오롯이 받아들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몰입감이 주는 쾌감이 상당하다. 아무 사전 지식 없이 펼쳐든 <침묵 박물관>, 딸기우유빛 핑크색의 표지가 준 달달한 첫 인상은 책의 초반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이 세상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박물관.
<침묵 박물관> p.46
박물관을 짓겠다는 노파와 그녀의 의뢰를 받아 고즈넉하다못해 고여있는 듯한 마을에 도착한 남자, 이 둘의 만남은 처음부터 기묘했다. 지나치게 열심이고 진지한 남자와 입만 열면 타박에 호통일색인 노파의 만남이라니, 심지어 이 노파가 박물관에서 전시하겠다는 물건은 다름 아닌 죽은 이들이 남긴 유품이었다. 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기획하고 만드는 것에 더해, 유품을 수집하는 임무까지 맡겨진다. 고인이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면서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그를 기억하는 물건, 죽음의 완결을 영원히 저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내 가져오는 것까지 남자가 해야할 몫이 되었다.
잇따라 발생하는 죽음, 그리고 사건들
남자는 어쩌면, 누군가 죽음을 맞아 새로운 유품을 수집해야하는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마을을 떠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 달리 109세인 노인의 죽음을 시작으로 잇따라 죽음이 찾아온다. "장례식은 일종의 축제야. 어두운 바닷속을 헤엄치는 심해어처럼 유연하게 행동하는 거야(P.66)"라는 노파의 조언대로 장례식장에 참석해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품을 수집하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새 원래부터 죽은이들의 유품 수집과 침묵 박물관을 위해 존재했던 사람처럼 죽음이 매듭지으려던 생명을, 다른 의미로 지속시키는 일을 계속 해나간다.
"매일 다양한 유품을 접하면서 깨달았어. 유품은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물건인데, 왠지 사후 세계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러니까, 과거를 가둬놓은 상자가 아니라 미래를 투영하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어.(P118)"
10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은 외과의사의 유품은 불법으로 귀 축소수술을 할 때 쓰던 메스였고, 69세 무명의 화가로 생을 마감한 여자의 유품은 36색의 유화물감이었으며, 평생 살림만 하다 폐렴으로 죽은 할머니의 유품은 자신보다 한 해 전 폐렴으로 죽은 개의 사체였다. 그들이 선택한 유품들은 하나같이 금전적인 가치는 없지만 망자의 삶을 요약해낼 수 있는 힘과 메세지가 담긴 물건들이었다. 계절이 세 번 바뀌었고 남자는, 자신이 그리던 박물관의 이미지를 하나둘 구현해냈다.
유품을 전시하는 침묵 박물관과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 살인 사건들, 여기에 침묵 전도사와 마을의 '울음 축제'라는 요소까지 더해져 조금은 음산하면서도 신비로운 <침묵 박물관>의 오묘한 이미지가 되어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내가 예상했던 결말과 좀 달랐기도 하고 좀 이해가 안되는 난해한 부분이 있어 '옮긴이의 말'이나 짧은 해설이라도 기대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이, 말 그대로 소설이 '끝'이 났다! 잠시 당황하기도 했으나 이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 집안일을 끝내고 잠든 아이들의 침대 머리맡을 정돈해주며 필요없는 집안의 불을 하나씩 끄고 나면, 식탁으로 가 <침묵 박물관>을 펴고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거대한 석조 마구간 앞에는 <침묵 박물관>이라는 명패가 있고 박물관 전시를 위해 몰두하고 있는 남자와 소녀에게 말을 건네 본다. <침묵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들이 죽음의 매듭을 풀고 존재의 영원한 세계를 구축해가는 것처럼 나는, 책의 열린 결말을 통해 나만의 스토리를 무한대로 상상해나간다. 독서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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