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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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고상 최우수 장편상, 로커스 상, 알렉스 상 등 어마어마한 수상경력을 가진 여성작가 N.K.제미신의 첫 단편집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 단편집엔 2004년부터 2017년까지 쓴 22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장편들을 써내기까지의 여정과도 단편들을 모은 책이다.

그녀는 책머리에서 흑인인 여성이 SF라는 장르에 입성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그 안에서 인정받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했다. '단편은 쓰고 싶지 않았다.'는 그녀는 공과금을 내기 위해, 학자금을 갚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 외에도 중국 SF소설의 3대천왕 중 하나이자 <삼체>를 쓴 류츠신 역시 도박으로 월급을 다 날리고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니 역시 창작의 고통이란 '궁지에 내몰림'이라는 처절함이 있어야하나 싶기도 하다.


<위대한 도시의 탄생>


22편의 단편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위대한 도시의 탄생>이다. 나는 주로 심야에 독서를 하는데 이 단편을 읽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왠지 모를 소리가 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그만큼 N.K.제미신의 문장들이 힘이 있었다.

P.51

등 뒤 골목에 몰려드는 건... 대체...뭐지? 뭐라고 해야할지모르겠다. 너무 많은 팔, 너무 많은 다리, 너무 많은 눈, 그 모든 게 내게 고정되어 있다. 그 덩어리 어딘가에서 검은 머리와 창백한 금발의 두피가 모이고, 문득 이들이-이것이-내가 본 두 경찰임을 깨닫는다. 정말 꿈찍한 괴물. 골목의 벽에 금이 가면서 그것이 좁은 공간으로 스며든다.

P.53

비명을 지르는 금속과 타이어 속에서 현실 감각은 점점 흐려지고, 합체 경찰을 보고 멈추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이 세상 존재가 아니다. (중략) 비명 속에서, 합체 경찰은 그 세미 트레일러와 택시와 렉서스에 치여 산산조각이 나고, 앙증맞은 저 스마트 카도 사실 조금 방향을 틀지만 남아서 물컹거리는 조각을 치고 지나간다. 열두 개의 팔다리가 으스러지고 스물네 개의 눈이 짓이겨지며 주로 잇몸뿐인 입이 턱부터 혀까지 찢어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태어나고 소멸하기를 반복하는 생명체들처럼 대도시들도 태어나 성장하고 성숙하고 노쇠하다가 때가 되면 소멸한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나는 때 이 순간을 호시탐탐 노리며 생명을 삼키려드는 적이 존재한다는 것. 자연의 순리를 거스를 수 없듯 적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다. 그녀는 도시를 도와 숨구멍을 그려주고,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적을 뿌리채 뽑아버리진 못하지만 쫓아버리는 것, 그것이 주인공이 하는 일이다.

<위대한 도시의 탄생>의 주인공 역시 흑인이고 여성이다. N.K.제미신이 미국에서 겪었을 성/인종 차별이 투영하고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는 적들과 싸우는 것 그리고 그 배경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상력의 세계다.


그녀가 보고싶은 미래를 자아내기까지 작가로서, 운동가로서 치열하게 싸우고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라 할 수 있는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세 아이가 잠든 밤중에 읽기 시작해 새벽녘까지 이 책을 읽다보면 새벽을 여는 닭우는 소리(시골이라 그런가 닭우는 소리가 종종 들림)조차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이 소리를 들었다면 N.K.제미신은 어떤 상상을 펼쳤을까? 또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어딘가엔 이 도시의 숨구멍을 그려주는 이가 하루를 마감할 새벽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도 난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N.K.제미신의 장편들도 하루 빨리 만나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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