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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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않았던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맞닥뜨리게 될 때면 항상 가보지 못한 다른 삶을 상상하곤 했다. '그 때 그 길로 갔어야 하는데..' 그 터널도 결국엔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어둠도 인생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성장통과 변곡점들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졌다. 모든 게 그 당시 길을 잘못 들어섰기 때문에 감내해야하는, 잘못된 선택의 나비효과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나 자신에 대한 뭉근한 분노와 미움도 있었다. 내가 원하지 않던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동안 모든 부정의 단어가 깨끗이 사라졌다. 나의 한 계절도 지난 셈이다.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열정으로 동분서주하고 고층빌딩에서 추락하듯 좌절하곤 했던 나의 여름이 지났다. 그래서인지 <여름을 지나가다>가, 남의 방문을 허락도 없이 따고 들어가 남의 삶을 탐하고, 남의 역할을 흉내내는 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생의 시작은 어머니의 뜨거운 숨결로 보호받지만

그 끝에서는 철저하게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여름을 지나가다> p.8


인간은 오롯이 혼자다. 일찍이 부모가 이혼해 혼자 살아온 민은, 종우가 이유없이 좋았고, 자신의 미래의 아이에게 본인이 맛보지 못한 사랑을 줄 것이 예상되는 종우의 어머니가 좋았다. 종우와 민은 결혼을 약속한 사내커플로 청첩장까지 돌리고 곧 식을 올릴 예비부부였다. 그러다 그들이 연루된 분식된 회계보고서때문에 도산한 기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고 이것을 바로잡고자했던 종우와 그런 종우를 이해할 수 없었던 민은 결국 헤어진다. 생의 시작과 달리 인생의 홀로됨을 인식했음에도 홀로되지 않을 것을 욕망했지만 결국 자신의 앎대로 하릴없이 혼자가 되었다. 목적없이 길을 걷던 민은, 어느 공인중개사 사무실에 붙은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들어가 일을 시작한다.


삶이란 결국, 집과 집을 떠도는 과정이 아닐까.

한 시절 거주한 집은 그대로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모든 집은 존재의 시간을 증명한다.

<여름을 지나가다> p.44


민은 중개사무소에서 받은 마스터키로 사람이 없는 집문을 따고 30분짜리 생애를 수집하고 다녔다. 타인의 삶을 살아보기, 그 사이에서 민은 약혼자였던 종우를 생각한다. 그를 배신하고 추방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다가 하나의 방에서 하나의 삶이 끝나면 또 어김없이 가구점으로 향한다.

한 목수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그가 만든 가구들이 전시된 그 곳은 수호의 삶을 서서히 파괴시키고 그의 아버지인, 목수의 내적 생명을 꺼뜨려버린 곳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마냥 밀린 임대료로 보증금을 착실하게 먹어치우고 있는 곳, 수호는 빚을 내어 빚을 갚았고 또 다시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된다. 민은 하나의 죽음을 맞아 자신이 살아있는지 의심될 때 여지없이 그 곳을 찾는다고 했다. 수호와 민은 그 곳을 공유하게 되었고 서로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우리의 삶도 아주 조금씩은 타인의 인생에 그늘을 드리우게 되지 않을까. 어느 날 아픈 수호를 위해 간호를 하던 민은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이 수호의 삶을 어찌해주지 못했지만 아주 작은 힘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름을 지나가다>의 조해진 작가님이 가장 아낀다는 한 문장처럼 '남자는 죽었고, 한 인간의 죽음을 우리는 다리인 양 건너갈 수가 없으므로' 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어찌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지만 남의 불행을 함께 슬퍼해주고 분노해줄 수 있는 심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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