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 최신 언어로 읽기 쉽게 번역한 뉴에디트 완역판, 책 읽어드립니다
혜경궁 홍씨 지음, 신동운 옮김 / 스타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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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은 한 시기에 작성된 것이 아니다. 혜경궁 홍씨의 조카 홍수영의 청으로 쓰기 시작하여 이 후 네 번에 걸쳐 작성되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그녀의 경험담과 전후 사정, 그녀가 생각하는 원인과 결과가 담겨있기도 하지만, 주된 목적은 자신의 친정 집안을 신원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작성되었기에 다소 편파적인 성향이 강하며 실제 학자들 사이에서도 역사적 자료보다는 궁중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높다한다.

제1권은 친정집안 사람들의 청렴함, 덕행, 효심 등의 찬사가 이어지며 이 내용은 다른 편에서 여러 번 중복되기까지 한다. 

제2권과 3권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와 임오사변과 함께 한 때 차세대 왕으로 확실시되던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전대미문의 스캔들로 폐위되고, 추후 왕위에 오를 아들마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보낼 수밖에 없었으며, 친 아들인 정조의 손에 친정집이 풍비박살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주인공이었던 혜경궁 홍씨,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굴곡진 그녀의 삶도 함께 그려지고 있다.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남편을 버린 혜경궁 홍씨, 친 아들을 '처분'할 것을 왕에게 고한 사도세자의 생모, 사도세자를 정쟁의 희생양으로 삼은 그의 장인과 노론파, 그를 지독히도 미워했던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와 비교해 지나치게 뛰어났던 아들 정조, 그리고 사도세자 본인의 정신병. 과연 사도세자가 뒤주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혜경궁 홍씨는 그 원인이 사도세자의 정신병(의대증)이며 그렇게 그를 몰고간 영조에게서 찾았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늦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늦둥이로 태어나자마자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다음해에 왕세자로 책봉했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가장 빠른 최연소기록이라한다. 그만큼 영조의 세자 총애는 실로 엄청났으며 사도세자는 일찍이 영재의 면모도 보여 그 사랑이 지극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사도세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불운했다. 왕위찬탈을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지겹도록 받아온 영조는 이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귀하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백일만에 저승전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고 경종을 모시던 내인들에게 맡겼다. 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제대로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정치색 역시 소론과 가까워진다.(경종의 정치색이 소론이었으니 아마 사도세자의 정치색 역시 어릴 때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사도세자의 정치적인 색은 장인인 홍봉한이 세자가 뒤주에서 죽어가는 데 침묵하는 이유 중 하나 였을지도 모른다.

제대로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과 영조의 지나친 기대와 뒤틀린 부성애때문에 사도세자는 조금씩 미쳐갔으며, 사도세자에게 영조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던 화평옹주의 이른 죽음과 정성왕후와 인원왕후의 잇다른 죽음 등으로 사도세자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너무도 불운했다. 영조의 장수(사도세자 죽음 후에도 14년이나 더 살았다), 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뛰어남도 임오사변이라는 비극에 조금의 원인은 있을 것이다.

<한중록>을 덮으며 수많은 가정을 떠올려본다. '만약 영조가 좀 더 사랑으로 아들을 바라봐주었다면? 사도세자가 영조의 비위를 맞춰줄 정도로 능글맞은(?) 성격이었다면? 아니 영조가 좀 일찍 죽었더라면? 정조가 그리 뛰어나지만 않았어도?' 많은 가정을 해볼 수는 있지만 어쨌든 사도사자는 한 여름의 폭염 속에 8일이나 뒤주에 갇혀 폭염과 배고픔, 갈증의 고통 속에 참혹하게 죽었다.

250년도 더 된 <한중록>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며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현실적인 육아 팁을 얻었다면 너무 우스운 일일까. 세기가 바뀌었어도 지금 이 순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중록>의 비극은 빚어지고있을테니, 내 앞으로 아이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충분히 주겠다 다짐하며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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