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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김민정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5월
평점 :
품절
화가 나 등 돌리고 엎드린 강아지의 발바닥 젤리
커튼 옆으로 삐져나온 고양이의 꼬리
길가의 작은 돌멩이를 보물처럼 주워 담는 꼬마
책『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은 나에게 이런 느낌이었다.
에세이치고는 엄청 두툼한 두께다.
목차를 열면
모리미 도미히코의 독서
모리미 도미히코가 좋아하는 것들
모리미 도미히코가 말하는 자신의 작품들
모리모 도미히코 식 힐링법
모리미 도미히코의 일상
소설가로서의 모리미 도미히코
에세이계의 전과, 에세이계의 작가 대백과사전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라는 제목과
새벽 색깔 표지와 삽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적는, 적고 있는 작가…어? 남자였어? 했다.
숲을 보는 도미히코씨
모리미 도미히코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밤과 술을 사랑했던 나여서 일까?
밤의 맛, 술의 맛에 빠진 아가씨가 마음에 들어 보게 된 애니메이션이다.
즐겁게 원작도 찾아 읽었다.
깜찍하면서도 발칙한 상상을 글로 스윽스윽 써 내려간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
∼히코는 남자에게 주로 붙는 일본의 이름인데도, 철썩 같이 여성 작가의 이미지로 기억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검은 단발머리 아가씨같은.
anyway
띠지의 “읽다 졸리면 그냥 주무세요.”라는 문구에 안도했다.
저절로 두께, 담는 내용에 대한 부담감도 점점 작아졌다.
머리맡에 두는 책, 자기 전에 읽어야 할 책을 써 보고 싶었다는 작가.
철학서처럼 어렵지 않고, 소설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책도 아니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어 하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재미있는 작품도 아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정보는 없지만, 읽고 있는 시간이 허무해질 정도로 무익하지도 않다. 독이 되는 것도, 약이 되는 것도 아닌 책. 중간부터 읽어도 되며, 읽고 싶은 부분만 읽어도 되는 책. 다양한 글이 수록되어 있어서 그 몽롱한 분위기가 태평양에 떠 있는 이름 모를 섬의 모래 사장에 왔다가 물러가길 반복하는 파도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을 평안한 꿈의 나라로 유혹할 것이다.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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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도 단순히 눈을 즐기는 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 영화와 꼭 만나야 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p60
광활한 곳에 홀로 외로이 있는 풍경에 목말랐던 유년 시절의 도미히코.
중학생이 되어 본 <스피릿츠 오브 디 에어, 그렘린 오브 더 클라우즈>. 시기를 놓쳐 만났던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고등학생 때 본 애니메이션 <천사의 알>
대학생 때 본 영화 <그랑블루>
물 공포증이 있던 나지만, 물과 바다라는 동경이 마음 속에 있었는지
물의 상승과 하강, 믈과 만나는 사람의 이미지는 조용하면서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후에 다큐멘터리 <아틀란티스>까지 이어져
나에게는 바다는 또 다른 하늘, 수영은 도약이자 비행이라는 수식으로 연결되어있다.
작가 모리미 도미히코는 그 시기를 놓쳤으나.
나는 영화와의 타이밍이 적절했나 보다.
그런 마음으로
아직도 물이, 물을 유영하는 나 자신이 무섭지만
난다는 생각으로 물과 만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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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또 사고 문구점에 새로 나온 부드러운 종이를 보면 아이디어가 샘솟을 것 같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것만 있으면 단박에 인기 작가가 될 것 같은 헛된 기대를 품었고, 매장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지갑을 열었다. 이후 복사용지에까지 욕정을 품게 되었을 때는 10년은 써도 다 못쓸 정도의 노트와 메모장이 산처럼 쌓여있는 상태였다. 아이디어는 쌓여 가는 노트를 따라가지 못하는데…. 휴우, 나는 어제 또 노트를 사고 말았다. p62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작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시시한 생각을 하는 구나’하며 동지의식과 미묘한 웃음을 짓게 된다. (아닌 부분이 더 많다.)
나의 한 해에 대한 포부와 계획적인 삶을 다짐하며 준비하는 다이어리가 이런 것일까?
3분의 1일까지는 무언가 담겨 있다. 빽빽한 밀림에서 벌초 후 밑동만 남은 숲처럼 말이다.
그후 매일 뭔가를 끄적이지만, 그 때마다 가방 안에 다이어리는 없다. 손에 잡히는 건, 영수증, 광고지, 휴지. 다이어리 대신 거기에 적는다.
그러면서도 해의 마무리에는 꼭 사게 된다.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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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세상에 빠져든 게 아니라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감각.
“뭐야, 별 거 아니잖아?”하는 느낌. 아버지와 작은 모험이 끝났을 때 내가 느낀 안도감과 치히로 가족의 그것이 무척 닮았다. p87
여행을 좋아하지만 비행기를 무서워한다.
스릴러를 좋아하지만 영상은 무서워한다.
놀이동산은 좋아하지만 놀이기구는 무서워한다.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상으로 다시 밝음으로 나왔을 때
나 역시 “뭐야, 별 거 아니잖아?” 한다. 하지만 다시 그 상황에 처하면 또다시 두려움에 떤다.
아이들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작운 모험 속에서 내 몸 속 자명종 시계가 울린다.
공포와 안도의 신호를 보내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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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설명’을 버린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인데, 자유로워지는 것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벼랑 위의 포뇨>는 무척 무서운 영화였다. p95
안정된 길인가
실험적이지만 하고 싶은 길인가
비단 창작활동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니다. 마치 장애물 경기처럼 놓여 있는 선택의 순간들.
나의 행복한 중년과 노년 생활, 아이들의 건강한 미래 등을 떠올리는 문장이었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냥 시작하는 것이지, 어떻게 시작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집을 나설 때 ‘자, 지금부터 후지산에 오르자!’라며 어깨에 힘을 주면 도리어 집 밖에 나가는 일이 두려워진다. ‘그냥 잠깐 산책 다녀오는 것 뿐이야’하고 가볍게 생각하면 그나마 한 발짝이라도 나가보고픈 마음이 들 것이다.
무언가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을 가졌었다.
후지산처럼 뭔가 큰 그림, 큰 결과를 그리다보니 겁이 났다.
한걸음 떼보지도 않고, 시도조차 머릿속으로만 하고 끝난 적도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을 그냥 해 나가는 것.
무언가 하고 싶을 때 정말 가볍게 시작해 보는 것, 이제는 안다.
걷다보니 길이 되어 있을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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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면 기분 전환도 할 겸 여자 친구라도 사귀어라. 그러면 더 재미난 공상이 펼쳐질 게 분명해.”
그녀는 그렇게 따뜻한 조언을 남겼다.p265
집주인 할머니의 삶에 대해 궁금해진다.
할머니를 꿈꾸게 해 준 사람들과 그녀의 모험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나이 든 다음 이런 따스한 조언을 해 주는 사랑스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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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기 전 펼치는 책,
오늘 나의 모험이 어땠는지 떠올리고
내일 나의 모험을 어떨지 그려보게 되는 책 『사람이 귀엽게 보이는 높이』다.
인생을 짧아
모험을 하자
책상 안이든
책상 밖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