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공공신학은 처음이지? - 일상과 신앙을 이어 주는 공공신학 입문서 내일을 위한 신학 시리즈 1
황경철 지음 / 세움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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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어지럽고, 다소 정리되어 있지 않았던, 그냥 머릿 속에서 불특정하게 배열되어 있었던 개념들이 어느정도 적절한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책을 읽는 가운데 계속해서 시원함을 느꼈다. 정리되는 느낌을 주는 책을 만나게 된 것이 너무나도 반갑다.

우리의 왜곡된 상태에 주목하는 것은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의 균형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론 이 극단에 대해 극단으로 반응하며 대응하는 모습들을 모든 영역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공적 영역에서는 극단에 대한 극단으로의 반응이 일반적인 것 같아 보인다.

공공신학이 신학의 세부 섹션으로 연구된 역사가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공공신학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이 최근인 것이지, 막상 저자가 이야기하는 공공신학, 복음의 총체성에 대한 것들은 성경 자체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다루고 있는 개념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이 개념을 오래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앙의 사유화, 신앙은 결코 개인에게 국한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만,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해서만 이르게 될 수 있는 것인가? 공공신학에 대해서 간결하고, 신학에 대한 배경지식들이 많이 있지 않더라도 잘 소화할 수 있게 정말 든든하게 배고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책이 등장한 것에 대한 감사함은 너무나도 컸지만, 이러한 감사함과 함께 너무나도 쓸쓸한? 마음이 함께 있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 나니 깨닫게 되었다.

“보고 싶은대로 본다.” “알게 되면 끝이다.” 우리는 여기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개혁신학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슬로건은 개혁의 지속성 아닌가? 개혁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된 신학은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 어느순간부터 나의 것이라 여기며 세웠던 신앙의 굳어진 틀이 고발된다.

공공신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하는 반응은 결국 회개였다. 성경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나의 틀에 가두려 한 모습들, 복음의 총체성은 결코 우리가 세운 어떠한 틀들에 갇힐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어떠한 사고나 체계나 틀에 가둬질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만 한다. 굳어진 신앙은 곧 죽은 신앙이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수직적 관계의 회복은 필연적 수평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 중에 하나가 아니다. 수평을 통한 수직이 아니다. 순서도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나님과 나의 수직적 관계의 회복이 먼저다. 하나님과 공동체의 수직적 관계의 회복이 먼저다.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함을 통해 회복된 수직의 관계, 그렇게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진 복음은 결코 사유화될 수 없다. 사사로운, 개인의 어떠함을 만족시키는 것에 그치는 복음이 될 수 없다.

온전한 수직적 관계의 회복은, 그 회복을 이룬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른 복음을 알게 된다면, 그 복음을 믿는 온전한 믿음은 필연적 수평으로 이어진다. 공공신학은 복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필연적 수평에 초점을 맞춘다. 필연적 수평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구체적을 나타나는지에 더욱 주목하는 것이다.

관계는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는다. 관계는 지속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그 지속성 속에서 관계는 더욱 깊어진다. 그렇게 수직적 관계는 더욱 견고해진다. 그럴수록 수평적 확장, 우리 주변에 관계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각자의 구체적인 영역들로 수직적 관계의 아름다운 확장이 일어난다. 그 복음이 결코 우리를 채우는 것에만 그칠 수 없고, 항상 차고 넘치게 하는 복음이기에, 우리가 값싼 복음이 아닌, 바른 복음을 붙잡고 있다면 그 복음은 늘 나를 넘어 주변으로 흘러갈 것이다.

복음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듯이, 복음이 모든 가로막은 벽을 허물듯이, 복음은 모든 문화 영역들도 차별하지 않는다. 복음이 그것이 진정으로 그것되게 하기 때문에, 복음이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되게 하기 때문에, 복음은 세부적인 모든 영역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창조질서에 합당한 그 영역되게 한다.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은 없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은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신학은 곧 복음을 붙잡고 치열하게 씨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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