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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ㅣ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평점 :
《구토》_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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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캉탱은 아이들이 물수제비뜨기 놀이를 할 때, 자신도 그 애들처럼 돌멩이 하나를 바다에 던지고 싶었다. 그가 넓적했고, 한쪽 면 전체는 말라 있었고, 다른 쪽은 축축하고 진흙이 묻어 있던 돌멩이를 잡았을 때 바로 그 순간, 역겨움을 느꼈다. 그 당시에는 원인을 몰랐지만, 그는 이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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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돌멩이를 들고 있었을 때의 느낌이 분명히 생각난다. 그것은 일종의 달착지근한 욕지기였다. 얼마나 불쾌한 느낌이었던가! 그 느낌은 분명히 돌멩이로부터 왔다. 돌멩이에서 내 손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래, 그거였다. 바로 그거였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p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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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사르트르가 쓴 소설 《구토》의 주인공은 앙투안 로캉탱이라는 연금생활자인데, 특별한 직업은 없고 여러 지역을 여행한 후 3년 전부터 롤르봉 후작에 대한 역사적 연구하기 위해 부빌이라는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는 아내도, 자식도 없다. 도서관과 카페만 오가는 고독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이따금 구토증을 유발한다. 문손잡이를 잡으며,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바닷가에서 주운 돌멩이에서, 카페에서 맥주잔을 쥐면서, 아돌프의 연보라색 멜빵을 보면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집으려고 하면서 주위의 곳곳에서 구토를 느낀다. 구토감에서 유일하게 해방되는 순간은 바로 카페에서 틀어주는 〈섬 오브 디즈 데이스Some of these days〉라는 낡은 축음기로 노래를 들을 때이다. 그렇다면 사르트르가 말하고 싶었던 로캉탱의 구토의 의미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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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가 벤치 바로 아래의 땅에 박혀들고 있는 모습을 보다가 구토증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구토의 열쇠를, 자신의 삶의 열쇠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부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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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토를 이해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다. (……) 핵심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 난 이점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를 꾸며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어떤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p305~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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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로캉탱의 이렇게 다양한 구토 현상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를 보았을 때, 단순히 여기 있을 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존재하는 데 ‘아무런 이유’가 없고 우연적이다. 이것을 ‘부조리’라고 말한다. 스스로의 존재 이유도 모른 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존재의 부조리로 인한 허무감 때문에 구토를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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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실존주의의 제1원리’로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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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p28)
“자유는 실존(existence)이고, 실존은 그 자신에 있어서 본질(essence)에 앞서기 때문이다.”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p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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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본질이란 존재의 이유나 목적을 말하고, 실존이란 단순히 여기에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사르트르는 모든 존재는 두 개의 범주, 즉 ‘즉자’와 ‘대자’로 나눈다. ‘즉자’적 존재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물을 가리키며, ‘대자’적 존재는 인간을 가리킨다. 사르트르는 먼저 즉자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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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책이나 페이퍼 나이프(종이 자르는 칼)와 같은, 만들어진 하나의 물체를 생각해 보자. (……) 페이퍼 나이프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물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정한 쓰임새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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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즉자적 존재인 책과 페이퍼 나이프는 그것을 만든 이유와 목적이 먼저 존재한 후에 만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즉자적 존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대자적존재인 인간은 그와 반대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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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먼저 실존하고,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며, 세계 안에 불쑥 나타나 나중에 정의되는 것을 뜻한다. 실존주의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 불가능한 것은 인간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중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며,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것이 된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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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구체적인 인간상이 없다. 인간은 그 본질, 즉 목적이나 이유가 정해져 있지 않은 채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따라서 미래에 자신이 고른 어떤 인간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유에는 항상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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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도망갈 명분도 없고 고독하다. 그래서 나는 인간은 자유의 형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형에 처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자유인 까닭은 일단 세계 안에 던져진 바에는 인간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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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나 자신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의 말 안에는 ‘불안’, ‘고독’, ‘절망’ 등과 같은 허무감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라는 형에 쳐해져 있다고 말한 것이다. 특히 그는 실존주의자 가운데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선택한 모든 일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의지할 곳도 달아날 핑계도 찾을 수 없는 인간은 고독하다. 《구토》에서 로캉탱이 느끼는 구토 현상은 바로 대자적 존재로서 인간이 느끼는 허무함 또는 공허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난 날(birth)부터 죽는 날(death)까지 좋든 싫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choice)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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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캉탱도 자신의 구토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롤르봉 후작에 대한 역사 연구를 포기하고 부빌 시를 떠나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막으로 카페에 들른다. 그곳에서〈섬 오브 디즈 데이스〉의 멜로디를 들으며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소설’을 쓰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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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러면 그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앙투안 로캉탱이 이 책을 썼어. 카페에서 빈둥대던 빨간 머리 친구지.” (……)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이 완성되고, 내 뒤에 놓을 때가 올 테고, 그것이 발하는 약간의 빛이 내 과거 위에 떨어지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나는 그 책을 통해 내 삶을 혐오감 없이 떠올릴 수 있으리라. 어쩌면 어느 날, 나는 바로 이 시간을, 내가 웅크리고 앉아 열차에 오를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이 우울한 시간을 생각하면서,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을 느끼며, “모든 게 시작된 것은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어”라고 중얼거릴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마침내 자신을―과거 안에서, 오직 과거 안에서―받아들일 수 있게 되리라. 《구토》, 문예출판사, p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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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구토》는 단순히 일기 형식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서술 기법들이 녹아있다. 즉 이 작품은 난해하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그의 철학적 사유 때문이다. 따라서 구토라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이번에 출간된 문예출판사의 에디터스 컬렉션《구토》의 작품 해설인 ‘구토의 의미와 극복:문학을 통한 구원’이라는 부분은 읽어보면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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