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손으로 꾹 누르면 물이 흘러나오는 홍시처럼 슬픔을 가득 담고 있지만
겉으론 쾌활한 색과 밝은 웃음을 보이는 사람.
이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온두가 름과 햇살이 가득한 거실에서 눈을 떴을 때,
그 햇살을 가늠해보기 위해 눈을 감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물어보고 싶었다.
안녕, 잘 잤니?
그만큼 온두의 캐릭터는 시작부터 끝까지 생생하게 독자를 사로잡는다.
동반자살을 하려던 부모 때문에 유아기 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온두.
그녀는 유모차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베이비 앤 마미에서 늘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엄마들에게 유모차를 추천해준다. 그녀가 추천해주는 유모차는 아기와 엄마에게 적당하다. 온두는 유모차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반면, 어떤 강력한 과거의 어두운 상처를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그녀는 독설과 불친절한 대응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그리고 혼자만의 안락한, 유모차 같고, 자궁 같은, 트렁크에 몸을 말고 숨어든다.
그녀의 평온을 깨트린 사람은 름. 온두는 름을 공터를 시끄럽게 만들었던 청소년과 단 한번의 쓰레기 투하로 덜미를 잡혔던 장로님처럼 대하려했다가 름이 공터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태도를 바꾼다. 더군다나 름 또한 ‘슬트모’의 존재를 알고 가입하기를 희망하는 안전하게 숨을 자리, 안전하게 잠잘 곳을 찾는 사람인 것.
뿌까. 름은 온두를 처음 만났을 때, 오래 전 자신의 트렁크를 빌려줬던 소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름은 온두에게 치킨차차차, 를 미끼로 과거의 기억을 파헤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온두는 름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의 대부분을 잊은 척, 실제로 잊었다고 믿어버린다.
름과 온두가 유아, 혹은 유년기의 상처를 풀어내는 방식은 독특하다. 치킨차차차. 게임의 제목자체가 경쾌 발랄이다. 그렇지만 이 게임은 만만치 않다. 이 게임에 진 사람은 색깔마다 정해진 벌칙으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발랄한 게임은 칙칙하고 무거운 과거를 끄집어낸다. 름은 아버지의 기억을 살려내기 위해 게임을 만들었지만 결국, 치킨차차차는 름의 상처를 치료하는데 쓰였다.
“제가 이겼습니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내 닭이 서 있던 주황색 달걀 모양을 집어 들었다. 그는 퓨마를 데려와 내 승리를 훼방 놓은 것이다.
“주황은 학창 시절입니다.”
“무슨 소리예요?”
“주황에서 지면, 학창 시절을 말해야 합니다. 그게 벌칙이란 말입니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벌써부터 내 입에서는 이야기의 블록들이 달그락거렸다. 그것들이 입 밖으로 나가면 거대한 집을 지을 수도 있고, 다 지어놓은 집을 모래로 만들 수도 있다. 모항주 당신이, 나 뿌까를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머리와 입이 따로 움직이는 사람이야.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내 입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
이 밝고 쾌활한 게임으로 름은 자신의 상처를 온두에게 날것으로 보여주며 온두의 상처 또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머릿속이 달달달 끓고 머리에서 늘 단백질 타는 냄새가 나는, 뜨거운 콩인 온두는 과거와 기억을 거짓으로 꾸며낸다.
‘피’는 나더러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너한테는 세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아! 하나는 현재의 너야. 냉소적이지만 나름대로 쾌활한 자아. 네가 사람들한테 툴툴거려도 명랑하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언젠가 감동 깊게 봤다는 들피집 이란 영화가 있었댔지? 내가 영화 마니아인 것 너도 알 거야. 나는 들피집이란 영화를 찾아봤어. 그 비슷한 내용의 영화도 없었어. 네가 이야기한 들피집은 네 과거일지 몰라. 물론 비틀린 기억이겠지. 비틀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게 두 번 째 자아야. 세 번째 자아는 현재의 너와 두 번째 자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해. 그런데 그 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냥 거짓말만 할 뿐이지. 아무 노력도 안하는 무책임한 자아야.”
간헐적으로 온두는 뒤틀린 자신의 기억과 조우한다. 들피집, 성추행을 하던 학교 선생님, 교복남녀, 다락, 할아버지, 집단자살, 다락에서의 환상, 항아리, 항아리 속에서의 출산, 들피집 할머니의 죽음, 기자와 방송국 사람들, 최초로 트렁크에 들어갔던 일, 약을 먹이려던 엄마의 모습.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트렁크에서 잘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 춥고 어두운 유년의 과거를 발랄하게 드러내는 방법에 있다. 트렁크에서 자는 현재, 어둡고 들춰보고 싶지 않은 유년의 기억,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인 치킨차차차. 이 세 가지가 정확히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그 무게중심에 온두와 름이 있다.
건물의 균형을 잡아주는 름이 그 삼각형의 중심을 잘 잡고 있어 이 소설은 어둡고 읽는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끔찍하고 무서운 사건들을 나열하지만 경쾌하게 읽히고, 읽는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빨리 읽혀 아까운 소설을 만나 반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