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동안 앉아있었냐면, 아주 오래 앉아 있었다.
날짜로 말해야 한다면 2만 6440일 이상, 시간으로 환산한다면 63만 4560시간 앉아있었다.
65만 시간의 기다림
2023년 3월10일 오전, 충남 아산 성재산에서 알 수 없는 유골이 무더기로 발굴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 두명이 아닌 그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죽임당한 듯하다. 스스로도 너무 오랜시간동안 흙속에 잠들어 있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이 유골의 이름은 A4-5다.
책의 시작이 영화 같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때 민간인 학살사건의 피해자들과(유골) 체질인류학자로서 뼈가 보여주는 흔적을 쫓는 집념의 박선주 선생님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70년의 세월을 초월해 두 이야기가 동시에 교차되며 시작하지만 결국엔 두 이야기가 만나 한국전쟁에 머물지 않고 구석기시대로, 250만년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까지 팽창해 나간다. 책의 제목인 '본 헌터'도 박선주 선생님의 이메일 주소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사건의 실상은 생각한것 보다 훨씬 더 참혹한 절규였다. 어린아이, 여자, 노인, 청년 가릴것 없이 모두 죽이고 또 죽였다. 장애인도 죽였고, 근처 농업중학교에 다니던 어린 학생들도 이유도 모른채 끌려와 무더기로 죽였다.
뼈로 보건대 나이는 16~20세, 18~22세 사이로 추정되었다. 참호 안에 이리저리 섞여있는 유골사진을 보며 경악스러웠고, 주변에 교복단추로 보이는 유품도 많이 나왔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에 살해당해 땅속에 묻힌 뼈만 남은 모습이지만 순간 어린 중학생들의 비명이 들리는 듯해 마음이 아득해졌다.
성재산에서만 정체불명의 유골이 나온게 아니다. 설화산, 새지기, 탕정, 신창, 선장 모두 사건이 일어났던 아산의 지역이름이다. 이 책에서는 성재산과 설화산 피해자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다. 저자가 이미 죽은 유골의 증언에 생생한 목소리를 입혀놓았기에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생전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느낌이 든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가해자가 이웃이나 동무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마을에서 알고 살았던 이웃들이 낫과 삽, 망치, 몽둥이를 들고 한 집안의 어른부터 갓난아기까지 모두 죽였다. 만삭인 부인이 피신한 친정까지 찾아 납치해 결국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멸문당한 집들이 셀수 없이 많았다. 이 후 살아남은 생존자는 가족 부모 형제가 모두 죽은 바로 그 마을에서 자녀를 낳고 살아가기도 한다.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이웃의 얼굴을 보면서 말이다. 어떻게 제 정신으로 살 수 있었을까. 감당해야했을 그 마음들이 상상하기도 어렵다.
아산에서만, 그 작은 도시에서만 천명이 넘게 죽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 대학살로 인한 알지못하는 이의 죽음들이 유골으로나마 조금이라도 밝혀진 것이 다행이다. 박선주 선생님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생생한 현장사진에 덧입혀진 이야기가 그때 죽이고 죽었던 대학살의 사건으로 깊게 몰입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