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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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전을 피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대한민국까지 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국제공항의 출국장에 무려 한 달이 넘게 체류중인 무슬림 가족이 있다. 이 가정의 맏딸인 버샤는 내전 중인 고향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 뒤 실어증에 걸린 상태다.

버샤 가족의 거처는 출국장 한쪽에 임시로 자리하고 있는 노천 하우스다. 이용객에게 피해를 덜 주고 최소한의 사생활을 보장받기 위해 구석 쪽에 여행 가방과 휘장으로 간이 벽을 두르고 임시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적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깨끗한 식수와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으니 난민캠프에 비하면 호텔급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난민 인정이 되지 않기에 보급품이 따로 없어 끼니 해결이 어려웠다. 난민 인정을 받을 때까지 스스로 먹을 것을 해결해야 하는 버샤 가족에게는 우유하나와 씨리얼이 전부다.

2.

버샤의 아버지 하만 가문은 부유한 명문가였다. 집 안에는 언제나 피아노 소리나 기도 소리, 웃음소리, 아니면 맛있는 음식 냄새가 흘러 넘쳤다. 마당의 작은 분수대에서는 끊임 없이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말 그대로 '행복한 우리 집'이었다. 하지만 원치 않는 내전으로 이제는 고향도 가족도 부와 명예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배고프고 또 배고파도 난민처럼 보이면 안되고 마치 출국장 이용객처럼 행동해야 했다.

돈 앞에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엄격한 무슬림 종교의 규칙과 질서는 무의미해 보인다. 마치 신이 돈에게 그 윗자리를 넘겨줘야 할 것 같은데, 쓸데없는 고집과 이미 뿌리 깊게 내리워진 편협하고 좁은 신앙 때문에 감히 신을 모독할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다. 이런 가파른 생존의 내리막길에서 무슬림에게 지켜야하고 구분해야하는 수많은 규범들은 더 이상 따질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나누고 가르는 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내몰린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구분 때문이다. 같은 무슬림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고, 같은 수니파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 그뿐인가? 군인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고, 뒷배가 되는 나라도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고.... 사소한 나누기에서 시작한 불씨가 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까지 내몰지 않았나.

36p

3.

난민 인정 심사를 위해 대기하는 중에 버샤는 한 사람을 만난다. 공항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진우였다.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진우는 우연히 만난 버샤를 보고 새로운 감정을 키우고 버샤도 곧 그에게 마음을 열고 점점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녀에겐 비밀이 하나 있었는데, 그 비밀이 그녀에게는 투명한 감옥이었다. 그곳을 깨고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입을 통해 소리내어 전하게 되면서 그제서야 스스로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 자체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삶을 살기에 그곳은 숨이 막히는 곳, 가정의 어떤 부모도 딸들에게 꿈이나 이상 따윈 묻지 않는 곳이다. 그러나 버샤는 무슬림의 딸로 살기에 너무나 자유롭고 독립적이 소녀였다. 가만히 앉아서 수예 따위를 하는 것보다 새로운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살기를 원했다.

기약도 없고 희망도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는 낯선 땅 공항의 한쪽 구석에 있는 가련한 난민 여자가 한국 사람인 진우의 환대와 친절,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알리는 영상을 촬영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우리의 마음이 서로에게 가 닿았으니 우린 이미 국경을 넘어선 거예요.

320p


4.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각박한 세상이 내 생각과 배려의 지경을 점점 좁히려 드는 것 같다. 나 먹기도 살기 힘든데 무슨 난민 걱정이냐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도와는 주지만 국내로 받아들이는 수용의 문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런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누구라도 난민이 될 수 있고, 솔직히 난민 문제를 벗어나서도 차별과 소외 그리고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권의 가치를 같은 범주에 놓고 본다면 난민 문제도 내 시각에는 중요하고 신중하게 짚어나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후 버샤의 여정도 진심으로 응원하며 벌써 새벽 두시가 된 시계를 바라보며 조용히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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