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과 <스노볼1-2>에 이어 세번째로 접하는 창비의 k-영어덜트 시리즈. 대본집으로 먼저 읽어본 <폭풍이 쫓아오는 밤>은 정말 책장 넘기기가 바쁠 정도로 흥미 진진한 소설이였다. 트랜드와는 거리가 먼 30대 후반의 내가 보기에 좀 유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기우였고, 주요 인물들의 상처에 안타까워하고 괴물과 맞서면서 과거의 악몽을 스스로 극복해가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보낸 시간들이 즐거웠다.
첫 장면은 열일곱살 이서가 여섯살 여동생인 이지를 등에 업고 폭우가 쏟아진 산길을 전력 질주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무언가에 공포를 느끼고 동생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쫓기듯이 도망치는 긴장되는 도입부에서부터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엄마를 떠나보낸 후, 일에 바쁘지만 두 딸을 살뜰히 챙기는 다정한 아빠가 숲속의 수련원으로 가족여행을 가자며 무리한 계획을 실행한다. 사건은 수련원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인터넷과 통신이 끊기면서 시작된다. 곰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고 한 번도 본적 없는 외양의 비정상적인 대형 포식종이었다. 이 괴물이 소설에 현실감을 좀 떨어뜨리지 않을까 했는데, 괴물에 대한 내용이 중반부에 충분히 설명되어 그런지 어색하지는 않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이서와 괴물의 사투가 시작되는데, 개인적으로 어떻게 싸워 이기느냐보다 '죄를 입은 인간만을 잡아먹는 악마'인 괴물에 자신을 이입하여 고통스러워하는 이서의 태도에 마음이 더 쏠렸다. 자신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이 뒤엉켜 열입곱의 소녀의 인생을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이서에게 이 괴물은 악마가 아니라 마음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였다.
이서는 엄마가 죽은 뒤 고통스럽고 미련스러운 상처로 가득찬 기억을 이 사건을 통해 이겨낸다. 바로 남은 가족들을 지키는 것, 동생인 이지와 아빠를 살려내는 것, 그것을 위해 자신을 위험 속으로 던지고 결국은 이 일을 통해 인생의 미래를 찾아낸다.
대본집과 같이 온 손편지에 작가는 이 소설이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나는 이야기를 읽으며 삶의 과정이 어쩌면 아픈 기억을 잊고 지우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들이라고 생각됐다. 지금 내 뒤로 남겨지는 나의 기억이 최대한 행복한 시간으로 남겨지기 위해 여행을 가고, 가족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취미생활을 하고, 일을 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등 모든 노력의 행위가 이 행복한 시간과 기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됐다.
이런 기억들이 쌓여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고 가족을 지키고 고통의 기억속에서 빠져나온 이서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따뜻하고 기분 좋은 온도의 기억만 쌓이기를 바라며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