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가뭄이 들면 바닥을 드러내며 말라버리는 강을 건너면 강둑 보다 낮은 사과밭이 있었다.

요즘같이 개량된 품종의 사과 나무가 아닌지라 뻗은 가지는 세월을 담아 굵고 가지 팔은 넖게 펼쳐진 봄날의 사과나무밭.

들어서면 초록을 머금은 사과꽃 향기가 아련하게 피어오른다.

푸른 열매 달고서 여름을 지나 붉고 탐스러운 심장같이 붉은 열매를 매달고 깊이 뿌리 내려 서 있던 그 사과밭, 그 붉은 사과.

 

요즘에는 잘 나오지 않는 아삭하고 신 홍옥이 주렁 주렁 열리던 그 사과밭을 생각해본다.

사과 씨의 맛......

어떤 맛일까, 약간은 과일의 비릿한 맛이 나기도 하고 입안에 남던 쓴, 사과씨의 맛.

과일 향기가 공기 중에 흐를 것만 같은 외할머니 베르타의 죽음으로 장례를 치른 이리스는 외할머니의 집을 상속받는다.

옛기억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는 외할머니의 집.

외할머니와 어머니, 이모들이 태어나고 자란 외할머니의 집을 상속받게 된 이리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 후에 그 집에 머무르면서 집을 둘러싸고 흐르는 옛기억들과 그 속의 어머니와 이모, 외할머니 그리고 사촌 로즈마리를 떠올린다.

구석 구석 묻어있는 그들의 기억에 이리스는 때로는 아련한 추억에 젖어 상념에 빠지기도 하고, 살아가며 망각속에 재워두었던 비극적인 죽음을 떠올린다.

 

사랑의 열병으로 일찍 죽은 이모할머니와 사과나무에서 떨어진후 기억을 잃어가는 외할머니, 손끝에서 별처럼 전기가 떨어지던 잉가 이모, 눈을 감고 비행 하던 하리에트 이모, 언제나 집을 그리워 하던 이리스의 어머니, 그리고 로즈마리

 

3대에 걸친 한집안 여인들의 사랑과 삶, 죽음 그리고 망각의 이야기들은 여기저기 숨어 있다가 집안 곳곳에서 이리스와 마딱드리며 이리스는 그녀들의 사랑과 죽음과 아픈 망각을 느끼게 된다.

 

사과 꽃 향기가 나는 그녀들의 신비한 사랑이야기와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추락과 함께 찾아오는 그녀들의 망각을 이리스의 눈을 따라가며 무겁지만은 않게 그려낸다.

마치 한편의 몽환적인 필름 영화처럼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기억과 망각은 순서대로 오고 가지 않는다.

자신이 얼마만큼 깊은 애정을 가졌거나 혹은 노여운 일일 수록 기억과 망각의 순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집안 여성들의 사랑과 삶과 죽음과 기억과 망각의 이야기 책이다.

그 안에서 나는 사랑과 삶과 죽음 보다 기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오랫동안 서성였다.

화창한 날 바람에 나풀거리는 하얀 천과 따뜻한 봄날의 봄바람에 흩날리던 사과꽃을 생각했다.

사과 나무가 붉은 심장 같은 열매를 매다는 날, 아삭거리는 신맛이 나는 사과를 통째로 씹어 먹겠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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