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 스펙트럼
신시아 오직 지음, 오숙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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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얇은 책엔 「숄」과 「로사」 두 단편이 실려있다. 먼저 표제작인 「숄」의 주인공들은 거리를 걷고 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몇 가지 힌트를 통해 그들이 걷는 거리가 수용소로 향하는 길이란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걷지만 그 길의 끝엔 생이 있을지 사가 있을지 알 수 없다. 로사는 아직 아기인 딸 마그다에게 제대로 된 음식도 주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숄로 감싸 딸을 숨긴다. 마그다는 숄을 빨아먹으며 숨을 이어가지만 마지막 희망 같은 숄을 뺏기자 당연한 수순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로사가 말했다. "잃어버린 게 있어서 찾고 있었어요."

"딱한 루블린. 잃어버린 게 뭐요?"

"제 삶요." (p.88)


짧고 굵은 단편 「숄」 뒤에 이어지는 「로사」는 「숄」의 30년 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삶을 뺏긴 로사는 제 손으로 남은 생을 망치며 살아가고 있다. 「로사」까지 읽고 나면 얇고 가볍게만 느껴졌던 책에 무게감이 더해진다. 그들의 고통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숄은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 마그다는 생명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숄도 마그다도 잃은 로사는 과거에 묻힌 채 나아가지 못한다. 비극엔 엔딩이 없다.


∣"댁의 삶이 없다고?"

"도둑들이 빼앗아갔어요." (p.45)


원래 같았으면 위 문단에서 감상이 끝났을 것이다. 홀로코스트 문학을 읽은 후의 먹먹함. 하지만 이번만큼은 여운이 다른 곳을 향했다. 이번 서평에 신청한 가장 큰 이유는 띠지 문구 때문이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돌아보는 인간 조건의 무게' 이팔전쟁은 진행형이다. 창살 없는 수용소로 팔레스타인을 내몰고 그들의 삶을 빼앗은 건 누구인가? 인류 역사에서 도둑의 역할은 폭탄 돌리듯 돌아간다. 끝이 없는 비극은 돌고 돌아 원형을 만든다. 역사의 승자인 유대인은 수많은 문학으로 소리 내고 있지만 우리는 팔레스타인 문학을 접할 수 없다. 숄은 길다. 숄을 뺏고 뺏기는 게 아닌 서로가 함께 둘러 마그다를 보호할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인간의 조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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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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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단편집을 기피하게 됐다. 진득하게 이어지는 장편 소설이 더 좋았다. 그럼에도 '김혜진'이라는 세 글자에 홀린 듯 서평단에 신청했다.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무슨 정보를 안 들 안 읽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더 선호하는 단편집이 있다면 발표한 시기도, 연재한 지면도 제각각이지만 모아두고 보니 큰 주제가 중심을 잡아주는 책이다. 『축복을 비는 마음』은 중심을 잡아주다 못해 연작소설이라고 해도 될 만큼 각 단편이 유사성을 띠고 있다.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작가 김혜진은 언제나 사회적인 소설을 쓴다. 이번에 그가 바라본 곳은 집이다. 집엔 집주인이 살 수도, 세입자가 살 수도, 관리인이 살 수도, 투기꾼이 살 수도, 연애하는 커플이 동거할 수도, 입주 청소 노동자가 살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 제일 많은 주거 형태인 아파트를 고층부터 찬찬히 리프트를 타고 구경한 듯한 기분이 드는 소설집이다.


∣이 나라는 부동산 때문에 망할 거야. 이 썩은 빌라들에 도대체 몇 사람의 밥줄이 달려 있는 거야, 세상에. (산무동 320-1번지, p.170)


서울의 밤은 반짝인다. 높은 건물들이 빛을 내고 강물이 반사한다. 저 수많은 반짝거림 속에 내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을까. 기숙사, 고시원, 셰어하우스, 원룸을 전전하며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입주 청소하고 이사했던 과거의 나를 옆에 앉혀놓고 같이 읽었다. 이 단편은 그 원룸, 이 단편은 저 원룸 때 생각난다 그치?


∣그녀는 어제와 오늘, 내일이 겹쳐 있는 듯한 자신의 하루하루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 (...) 자신의 삶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삶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미래」, p.209-210)


「사랑하는 미래」의 문장이다. 반복되는 일상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이대로 괜찮나? 동시에 불안한 주인공이 내 모습과 비슷해 동질감을 느꼈다. 제목답게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김혜진 소설에서 느끼긴 조금 힘든 감정이라 신선했다. 연인을 사랑하듯이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이 단편을 닫고 나오면 표제작이자 마지막 단편이 기다리고 있다.




∣축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는 거죠, 뭐. (「축복을 비는 마음」, p.270)


「축복을 비는 마음」은 입주 청소를 하는 인선과 경옥의 이야기다. 더 힘든 집을 만나면 억울하지 않냐고 경옥이 묻는다. 그리고 위 문장으로 답하는 인선이다. 이 작품을 읽는 나는 앞서 7편의 단편을 통해 일곱 개의 집을 들여다봤다. 마지막이자 제목이 되어준 대사.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집'은 다세대가 살고 있는 다른 형태의 집이다. 책장은 하나하나의 창문일 수 있다. 그들이 어떤 형태로 살아가든 맞이할 미래가 사랑스럽기를, 축복을 비는 작가의 단단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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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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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물욕이 적은 편이다(책 제외). 옷은 몸만 가려지면 되고 음식은 배만 부르면 된다. 물건을 한번 사면 해지든 깨지든 본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쓴다. 좋게 말하면 욕심이 없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대충사는 거다. 예전엔 궁상이었고 요즘엔 환경운동가스럽다. 구구절절 tmi를 남발하는 이유는 이 책의 구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작가의 생활과 취향이 한껏 버무려진 101가지 물건을 소개한다.


∣매일 들여다보는 물건일수록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이 일상을 함께하는 시간 동안 가장 즐거워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p.252)


사게 된 계기를 시작으로 회사와 제품을 소개한다. 640p로 두께가 상당하다. 서평단 활동으로 정해진 기한에 다 읽고 책을 소개해야 하니 급하게 읽었지만 이 책은 완독을 목적으로 읽는 책이 아니다. 옆에 끼고 경우에 따라 사전처럼 필요한 부분만 읽어도 된다. 물건에 별 욕심이 없는 나조차 당장은 아니더라도 때가 오면 참고하고자 관심이 가는 제품들은 따로 표시해놨다.


<고독한 미식가>나 <리틀 포레스트> 같은 힐링 먹방류에는 잔잔한 맛 표현이나 레시피를 읊는 특유의 리듬감이 있다. 먹방도 먹방이지만 만들 때의 표현을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을 때 비슷한 리듬감을 느꼈다.


∣취향의 선택은 까다로울수록 좋다. 값비싼 고급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본질에 충실하고 아름다움이 풍기는 물건들이 당긴다. (...) 삶은 물건을 쓰면서 이어간다. 자신의 일상이 소중하다면 살기 위한 물건들에 신경 쓰는 건 당연하다. (p.441)


아무래도 개인의 취향이 녹아있다 보니 호불호가 가릴 수 있다. 선택에 숙고하는 저자가 몇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한 물건엔 누구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반면 저자가 60대 남성이기에 쓰는 물건들이 있다. 면도기, 바리캉, 콧수염 가위 같은 것. 특히 미군 용품이 여럿 등장한다. 꼭 내가 쓰려고 읽는 건 아니기에 이런 세계도 있구나 알 수 있지만 좋은 취향을 가진 멋쟁이 아저씨로 늙어가고 싶은 남자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누각과 정자로 익숙한 전국의 옛 별서를 두루 찾아봤다.

라이카는 여전히 손대야 할 부분을 남겨 놓았다.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고 먹고 냄새 맡는 과정을 통해서만 감각하는 게 맞다. 즉, 라이카는 사진 찍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실감토록 함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예리하게 짚었다. - P29

그토록 많이 팔리는 빵이라면 규모를 늘려 많이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은 단호했다. "공장 규모로 빵을 만들면 맛을 지킬 수 없어요." 성심당은 매장 안에서 직접 구운 빵만 내놓았다. 가게 문이 닫히기 직전인 저녁 아홉 시까지 빵을 계속 굽는 걸 보고 놀랐다. 지금 이 시각이면 정리해야 하는데 왜 빵을 굽느냐고 또 물어봤다. 배고픈 이웃들에게 나눠 줄 것이라 괜찮다고 했다. - P131

매일 들여다보는 물건일수록 아름다워야 한다. 그것이 일상을 함께하는 시간 동안 가장 즐거워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52

오래되어서 낡은 것이 아니다. 새롭게 보지 못하는 눈이 낡음이다. - P270

바우하우스 공부를 통해 "본질이 곧 아름다움"이라 배웠기 때문이다. - P437

취향의 선택은 까다로울수록 좋다. 값비싼 고급품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본질에 충실하고 아름다움이 풍기는 물건들이 당긴다. - P441

취향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각자의 라이프스타일로 굳어진다. -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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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혁명 - 인간적인 기술을 위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성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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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요지는 간단하다. 1968년, 산업혁명을 지나온 인류는 완벽한 기계화 시대로 갈지, 인간적인 기계화를 이룩할지 갈림길에 있다. 후자로 가기 위한 인본주의적 방법을 제시한다. 다만 놀라운 게 있다면 반세기의 시대 격차에도 불구하고 소련 같은 구시대 표현 몇몇을 제외하면 지금 막 출간됐다고 독자들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시의성이 적절하다. '기계화'를 '인공지능' 정도로 치환하면 현시대를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적중률에서 그는 미래학자 같은 면모를 보인다.


목차를 중심으로 요약하자면


①교차로

서문은 작가의 말에 해당하고 1장은 실질적인 서문에 해당한다. 집필 당시 시대 상황을 진단한다. 


∣하나의 길은 인간이 핵전쟁으로 파괴되지 않더라도 기계 속 힘없는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가 되는 완전 기계화 사회로 이어지고, 또 다른 길은 인본주의와 희망의 르네상스, 인간의 행복에 복무하기 위해 기술이 존재하는 사회로 이어진다.(p.5)


②희망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이 있는가? 그렇다면 희망이란 무엇인가? '희망, 신념, 불굴의 용기'를 정의한다.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수동적인 기다림도 아니지만,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비현실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p.35)


희망은 부서졌다. 다만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절망을 직시하고 사회, 경제, 문화적 삶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고찰해야 한다. 가능성이 있다면 새로운 대안에 대해 조사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점점 커질 것이다.


③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나?

기술사회가 인간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였나.


∣2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생명 에너지가 기계 에너지로 대체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각 또한 기계의 생각이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p.66)


④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기술사회를 인간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화 즉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 연대, 본성에 대해 논한다.


∣인간이 지겨워지면 그는 수동적으로 변하거나 삶에 무관심해진다. 만약 인간이 IBM 컴퓨터 입력 카드와 동등한 존재로 격하되면 그는 독창성, 창의력, 관심을 잃게 된다. 내가 어떤 요소를 극대화하면 그에 따라 다른 요소들은 최소화된다.(p.168)


⑤기술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단계

기술사회를 인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시스템을 제시한다.


-인본주의적 관료주의에 의한 개인 역량 확대

-수동적 소비의 변화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심리 정신적 지향 


⑥우리가 할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사회집단을 관통하는 급진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문화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기술사회를 인간화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변화, 즉 기술사회를 물리적 파괴, 비인간화, 광기로부터 구원하는 데 필요한 변화는 반드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p.257)


전반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십분 이해되지만 인간 본성, 사회구조를 탐구하는 과정에선 철학자는 철학자구나 싶었다. 이 집단은 유구하게 보편적인 단어를 보편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통찰력만큼은 탁월해서 그들의 표현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게 만들고 비로소 이해했을 땐 쾌감을 동반한다.


프롬은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다. 두 전공의 장점이 책에서 시너지를 낸다. 인본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인간성에 대해 먼저 탐구하는데 이 부분에선 내가 모르던 내 본성까지 파악하게 됐다.


저자도 밝혔다시피 모든 측면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둥둥 떠다녔다.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하더라도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게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출간 시점이 적절했다는 것에 시대를 향한 끝나지 않은 고민도 있지만 최근 영화 <오펜하이머>로 대두된 '매카시즘'도 있다. 개정판 서문에서 프롬은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매카시 지명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에 썼다고 밝힌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68혁명, 반전운동이 일어난 해 1968년도에 나왔다. 시대가 어지러울 땐 늘 신세계를 꿈꾸는 책이 등장한다. 플라톤의 『국가』가 그랬고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랬으며 허균의 『홍길동전』이 그랬다. 프롬은 매카시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정책 방향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이 책은 프롬의 『군주론』이자 『유토피아』였다.

우리 한가운데서 망령이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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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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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근육을 풀업 살아갈 힘을 파워업


#첫문장

지수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줄거리

지수는 5년 전 전세 사기를 당하고 엄마 영애 씨와 함께 살고 있다. 모든 면에서 늘 앞섰던 동생 미수가 있다. 이끌려 들어간 헬스장에서 풀업을 하는 여성을 보곤 홀린 듯이 헬스를 시작한다.


#감상평

같은 그네를 타더라도 동생 미수는 높이높이 올라가지만 지수는 포기가 빨랐다. 그네를 시작으로 공부도 직장도 엄마의 기대와 관심, 사랑도 모두 미수가 앞섰다. 미수는 지수를 타박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수의 부족한 점을 메우고 가족의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철저히 지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미수의 속마음은 알 수 없다. 미수는 지수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이래라저래라 말을 하지 않는다. '미수'라는 이름이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수는 어떤 수치를 뜻하는 걸까 가늠해 봤지만 확대해석 같아 이내 생각을 지웠다. 


∣지수는 가족을 사랑했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정하건데) 그들을 진심으로 미워했다. 지수는 이 마음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p.114)


미워하다와 싫어하다는 차이가 크다. 미워하는 감정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미워할 수 있다. 가족이 아니었다면 친구도 되지 않았을 사람들을 싫어할 수 없다. 큰 시스템에 의해 차단막이 있는 것처럼 도무지 그런 마음은 들지 않는다. 


몇 해 전 엄마와 함께 간 제주도 여행에서 백수린 작가의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읽고 글자를 읽는 게 아니라 책 속으로 들어가 내 이야기와 책의 흐름이 막 뒤엉켰던 적이 있다. 가족 이야기는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이번에도 캐릭터들에 우리 가족들 얼굴이 하나씩 대입됐다.


일반적이지 않은 게 있다면 주인공인 지수가 아니라 동생 미수에게 몰입했다는 것이다. 디테일은 차치하고 우리 가족에서 나는 미수 그 자체다. 90년 대 첫째 남자아이를 오빠로 둔 둘째 여자아이. 당연한 수순으로 사랑과 지원은 오빠에게 향했지만 결과는 반대였고 모든 게 앞서는 내게 오빠가 기가 죽을까 조심하면서도 모든 기대와 부양의 의무는 내가 진다. 지수 정도면 괜찮은데? 싶으면서도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가선 주인공이 악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보여주지도 않는 미수 시점에 스스로 살을 붙이고 있었다.


∣철봉처럼 생긴 높은 기구에 두 팔로 매달린 채, 온몸을 들어 올렸다 내리고 있었다. 여자의 몸이 위로 올라갈 때마다 등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모양이 잡혔다. 지수는 그 모습에 조금 넋이 나갔다. 뭐랄까, 여자에게서 어떤 힘이 느껴졌다. 무슨 일을 겪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힘. (p.36-37)


소설을 읽으며 이미지 검색을 할 정도로 운동에 문외한이다. '풀업'이 뭔지 모르는 나는 소설의 제목을 김사과 작가의 『풀이 눕는다』의 반대쯤으로 인식했다. 그럼에도 운동에 영업이 됐다. 만 나이를 하고도 30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운동을 해야겠단 생각이 스멀스멀 들고는 있지만 아직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는데 이 소설이 운동을 해야겠단 생각에 확신을 더해준다.


포기가 빠르고 큰 포부가 없던 지수는 운동을 시작하며 자극점을 찾기 시작한다. 긍정의 언어를 들으며 힘을 얻는다. 소설에서의 지수는 내게 작은 악역이었지만 소설이 끝나고 변화할 지수는 더 이상 악역이 아닐 것이다. 그의 발돋움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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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는 서른여섯 살이었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사실 나는, 언니가 항상 뭘 모른다고 생각했어." - P67

생각해보면 관계는 참 쉽게 변했다. 상황이 달라지면서, 그냥 연락이 드문드문해지면서, 찰나의 순간에 의견이 부딪치면서.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냥 싫증이 났을 뿐이다. 인생은 생각보다 너무 길고 지겨워서, 그렇게 자주 변덕을 부리지 않으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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