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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을 걷다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1
김솔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4월
평점 :
강렬한 첫 문장이다. 둘로 나뉘었다니 유체 이탈인가 싶었지만 뇌졸중 이후 마비된 신체를 타인화하는 거였다. 남자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오른쪽 절반이 마비돼 절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더 이상 내가 아닌 오른쪽 신체에 쉥거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생과 사가 하나의 신체에 공존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감옥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라고 여기며 견뎠더니, 환갑이 넘은 나이에 갑자기 하나의 영혼이 두 조각으로 쪼개지면서 추악한 비밀을 은밀하게 숨겨놓을 고해소가 오른쪽 절반에 생겨났다. (p.94)
남자는 사십여 년 동안 금고를 만들었다. 주인 외엔 아무도 열 수 없는 금고였다. 주인이 원하지 않는 상태에선 금고가 열리느니 폭파해 버린다. 기폭장치가 작동하는 것이다.
남자의 집에도 금고가 있다. 금고 안에 작은 금고가 봉인된 형태다. 물론 자신의 금고에도 기폭장치가 되어있다. 뇌졸중 발병 이후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는 스스로가 기폭장치를 단 금고가 되었다. 절반을 분리하고, 구분하며, 봉인한다. 신체가 잠긴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황금과 죽음만을 걱정하다가 실수와 죄악을 반복했으면서도 마치 죽음 덕분에 평정심과 지혜를 얻게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는 나란 인간은 참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p.197)
가벼운 운동을 권고하는 의사의 말에 남자는 하천변을 걷기 시작한다. 묘사하는 하천은 청계천을 연상케 했는데 작가의 말까지 읽으니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광화문에서 청계천을 따라 걸으면 한도 끝도 없이 걸을 수 있다. 서울의 근현대사가 녹아있는 거리로 지루할 틈이 없다. 이런 청계천의 특징은 소설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하천을 따라 걷는 남자는 어느덧 사회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사회는 이내 개인의 역사로 좁혀들어간다. 제목 『행간을 걷다』는 하천변을 걷다로 치환할 수 있다. 하천을 따라 근현대사가 층층이 쌓였듯이 남자의 과거도 흘러 개인의 역사가 됐다.
30살 차이 나는 아내를 둔 남자, 시험하듯 이혼서류와 다이아몬드를 함께 금고에 넣어두곤 기폭장치를 설치한 남자. 남자는 고약한 구석이 있다. 소설은 그의 지난 이야기를 조명하는데 과거에는 더욱 드라마 같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자는 그 드라마에서 악역이었다. 하천을 걸으며 기록한 개인사는 죽음을 앞둔 남자의 긴 주마등인 셈이다. 소설 전체가 남자의 긴 독백이다. 그리하여 기록된 행간은 삶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사자의 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