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테이아 - 매들린 밀러 짧은 소설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새의노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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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들린 밀러의 전작을 재밌게 읽어 빨리 번역되어 출간되기를 기다려온 신작이다. 드디어 내 손에 들어온 책을 집어 들고 놀란 것은 너무도 새하얀 책의 물성. 빳빳한 도화지 재질의 종이로만 이루어진 이 책은 사람이 되기 전, 아니 어쩌면 피그말리온의 손을 거치기도 전인 상아색을 띤 돌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신생 출판사의 첫 책이기에 출판사의 시그니처 디자인인지 『갈라테이아』만을 위한 디자인인지 모르겠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신화를 익숙하지 않은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에 탁월하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흐릿했던 이름이 뇌에 새겨진다. 그저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할 장치에 불가했던 파트로클로스. 오디세우스의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인 키르케. 이제 로맨스로 포장되어 온 피그말리온 아내의 이름 갈라테이아를 새길 차례다.


재작년(작년인 줄 알았는데...)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와 그의 후궁 의빈 성씨를 다룬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둘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좋아한다. 의빈이 죽은 후 정조가 직접 쓴 비문이 아주 가슴 먹먹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찐사랑이 역사에 박제된 것을 그리 좋아하면서도 과연 의빈도 정조를 사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드라마는 주체적인 궁녀였던 덕임이 폐쇄적인 궁 생활을 하면서 시들어 가는 모습을 그렸다. 로맨스만 부각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포인트에 놀랐고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피그말리온의 신화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피그말리온은 마을의 여자들이 성에 안 차 직접 여성을 만들고자 조각한다. 만들고 보니 너무 완벽해 조각상을 사랑하고 만다. 반응이 없는 사랑에 지친 피그말리온은 신께 기도한다. 아프로디테가 그 열망을 들어줘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둘은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 신화인데, 그 어디에서도 갈라테이아의 선택은 없다. 창조자를 무조건 사랑할 이유는 없다.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피그말리온은 그녀를 소유한다. 여기서부터 갈라테이아의 비극은 시작된다. 애초에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을 사랑한 것이지,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 갈라테이아에게 할애된 대사는 없다. 심지어 이름도 부여되지 않고 그냥 '여자'라고 불린다. (p.53, 작가의 말)


피그말리온은 아내가 돌이었을 때처럼 대한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저 아름답게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딸은 점점 성장하지만 갈라테이아는 글자를 배우지 못해 직접 가르칠 수도 없다. 소설을 다 읽고 작가의 말을 볼 때 원전인 『변신 이야기』에서 갈라테이아에게 대사가 없다는 설명에 놀랐다. 『갈라테이아』에서 쓰기의 능력을 거세해 표현에 한계를 둬 원전에서 대사가 없는 부조리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신은 내 남편이자 아버지이니까요."

"어머니이기도 하고."

"맞아요, 어머니이기도 하죠. 그리고 오라버니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고. 이 모든 거예요." (p.23-24)


갈라테이아는 이미 한 번의 도망으로 인해 병원에 속박되어 의사와 간호사의 감시를 받는다. 병원에 있어야 할 사람은 갈라테이아가 아니라 피그말리온이다. 위의 대사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 창조자로서 그녀를 억압한다. 또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 애인, 남편 등 모든 역할이 되어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창조자와 피조물이라는 구도를 보자 나의 제1 피조물인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창조자의 일방적인 욕망으로 빚어올린 피조물이 나온다. 한쪽은 너무 못생겨서 버림받고, 다른 한쪽은 너무 아름다워서 집착 받는다. 미(美)의 유무로 두 피조물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린다. 유기와 집착. 어느 쪽도 행복하진 않다. 






∣ 여신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존재한다면 저 조각달은 여신이 나를 내려다보며 짓는 미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p.39)


문득 그의 소원을 들어준 신이 왜 아프로디테였을까? 궁금했다. 보통 사랑에 관한 소원은 에로스나 가정의 신 헤라가 관장한다. 원전을 다시 펼쳤다. 공간 배경이 아프로디테가 탄생한 키프로스 섬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아프로디테 축젯날 피그말리온이 기도 해 아프로디테에 닿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오직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을 탐했던 피그말리온의 소원을 미(美)의 신 아프로디테가 들어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변신 이야기』를 다시 읽으니 둘 사이의 아이인 파포스(심지어 아이 이름도 피그말리온 지 고향에서 따옴)의 이름도 나오는데 갈라테이아의 이름은 각주로만 등장한다. 그런 갈라테이아의 이름을 자료를 샅샅이 뒤적여 길어 올리고 서사를 부여하고 목소리를 낼 기회를 줬다. 매들린 밀러는 올림포스의 13번째 신이다. 갈라테이아를 향한 달의 미소는 아무래도 아르테미스겠지. 조각달이 신의 미소라니. 표현력에 한번 놀라고 내포된 의미에 두 번 놀란다. 그로신 키즈로서 짧은 이야기에 담긴 수많은 상징성에 두근거렸다. 신화 다시 쓰기는 언제나 짜릿하고 재밌다. 제발 신화의 소재만큼 다채로운 차기작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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