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그럴까? 어른이 되어서도 앤은 항상 그리운 존재였다.

분명히 수없이 읽은 책인데도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

서점에서 앤의 머리 색깔처럼 빨간 표지의 양장본 '빨강머리 앤'을 발견한 순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펼쳐드니 아~ 속지까지 너무 예뻐서 소녀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오래오래 간직하다가 우리 딸이 앤을 읽을 나이가 되면 선물로 주어야겠다.

내 책장에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두어야지.

 

 

책에서 묘사되는 앤의 모습을 너무 잘 표현한 그림.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마른 몸, 주근깨, 반짝이는 눈,

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예쁜 콧날까지.

어린 시절 단짝 친구를 떠올릴 때처럼 애틋한 건 왜일까?

참 신기한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빨강머리 앤을 샀다고 하니 다들 다시 읽고 싶다고 하더라.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앤은 어떤 느낌일까~~??

우선 아름답고 섬세한 배경 묘사가 경이로웠다.

그런 자연 환경에서 자란 앤이 부러울 정도로!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키워야 하는데!

그리고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우리모두 앤을 가까운 친구처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힘이구나. 대단한 작가다.

 

매슈가 기차역에 남자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긴장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앤.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돌아오면서 마음이 바뀌는 과정이 정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매슈뿐만 아니라 나도 앤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으니까.

 

마틸다가 다시 앤을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마틸다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철렁했다.

마틸다가 앤의 가정환경을 묻고, 앤이 대답할 때

지하철 안이었음에도 펑펑 울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린 시절에는 이 부분이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았던 것 같은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이 작은 소녀가 겪었을 일들이 너무도 마음 아파서,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릴라가 앤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토머스부인이나 해먼드 부인은 너한테 잘해 줬니?"

앤이 머뭇거렸다.

감수성 예민한 작은 얼굴이 갑자기 빨갛게 달아올랐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 어... 그분들은 저한테 잘해 주려고 하셨어요.

알아요, 최대한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려 하셨단 것을요.

잘해 주려는 마음만 있으면 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는 거잖아요.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많은 분들이었어요.

주정뱅이 남편이랑 사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잖아요.

세 번 잇달아 쌍둥이를 낳는 일도요. 그렇잖아요.

그래도 저한테 마음으로나마 잘해 주려고 하셨단건 분명해요."

마틸다는 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착하고 예쁜 마음씨를 가졌을까!

그냥 잘해 주지 않았다고. 많이 힘들었다고 하소연 했다면 마틸다도 나도 그렇게까지 마음 아프진 않았을텐데.

 

기억나는 에피소드 1. 레이첼 린드 부인, 엄청난 충격을 받다.

참견하기 좋아하고 말이 많은 레이첼 린드 부인이지만 이 지역에서 부인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런 린드부인에게 앤이 착한 아이로 보였으면 하는 마틸다의 바램은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우리 모두 자식에게 그런 욕심 한 조각 부린 적이 없다면 거짓말 아닐까? ㅎㅎ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거나 다른 가족을 만나기 전에 얼마나 아이를 단속하고 약속을 받아내었는지!

결국 아이가 착한 아이로 보였으면 하는 엄마의 욕심에 불과했다.

아무튼 그런 마틸다의 바램과 반대로 레이첼 린드 부인은 모욕을 당했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서는데..

 

솔직히 린드부인이 잘못했다. 고아라고 얕잡아 본게 아니라면 어떻게 면전에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아이라고 쉽게 말을 내뱉거나 어른 기분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실례인데!

 

"어머나, 예뻐서 데려온 건 아니네요. 정말, 정말이지 그러네요.

엄청나게 야위고 못생긴 아이네요, 마릴라. 이리 와볼래? 좀 보자.

세상에나. 무슨 주근깨가 이렇게 많니? 머리는 또 뭐가 이렇게나 빨개. 홍당무 같잖아!

얘, 이리 와보라니까."

앤이 다가왔지만 레이첼 부인이 바라던 방식은 아니었다.

앤은 단박에 부엌 마룻바닥을 가로질러 린드 부인 앞에 섰다.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입술은 파들파들,

가녀린 몸이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떨리고 있었다.

앤은 쿵쿵 발을 구르며 목멘 소리로 외쳤다. "정말 미워요. 미워요, 미워요, 밉다고요!"

밉다고 할 때마다 앤은 발을 더 세게 굴렀다.

"어떻게 깡마르고 못생겼다는 말을 그렇게 막할 수 있어요? 어떻게 주근깨투성이에다 빨강 머리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요! 저속하고 예의도 없는데다 감정도 없어요!"

 

다시 읽는데도 앤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 같이 화가 나고,

한편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를 레이첼 부인의 표정이 상상되어 웃음이 난다. ㅋㅋ

다른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설사 그 아이가 고아라 할지라도.

앤이 받았을 모욕감과 상처를 생각하면 나중에 사과하러 간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잘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과해야 할 상황은 무수히 많다는 걸.

특히 아이는 어른에게 화가 나더라도 표현하면 예의 바르다는 평가를 받기 어렵다.

내 아이가 앤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밤새 그 아줌마 욕을 같이 해줄거다.

대신 나도 마틸다처럼 사과하도록 할 것 같다. 아이가 자연스럽게 세상을 배우도록.

 

기억나는 에피소드 2. 매슈, 퍼프소매를 고집하다.

유행하는 예쁜 퍼프소매와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꿈꾸는 앤에게

마틸다는 가혹할 정도로 단정하고 실용적인 원피스만을 고집한다.

마틸다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니지만 사람은 언제나 실용적이고 옳은 것만 선택할 수는 없는데!!!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 한가지 정도는 들어주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매슈의 깜짝 선물을 받아들고 행복해하는 앤의 모습에서 나까지 짜릿할 정도로 행복함을 느꼈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도 그런 행복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외에도 에피소드 한가지 한가지가 다 사랑스럽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주근깨투성이 빨강머리 소녀가 특유의 상상력과 표현력을 바탕으로 멋진 시 낭송을 하게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해 길버트와 1,2 등을 다투는 우등생이 된다.

게다가 하얀 피부와 날씬한 몸매, 오똑한 콧날의 앤은 정말 예쁜 아가씨로 자랐다!

가슴이 뭉클한 성장과정이다.

예전에 읽을 때와 달랐던 건 앤을 친구처럼 느끼며 읽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은 엄마라는 관점에서 앤을 읽게 되었다.

소녀감성에 푹 빠졌다가도 우리 아이도 이럴 때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이럴 때 난 엄마로서 이런 역할을 해주어야지. 하는..

 

오랜 시간 자기만의 고집에 빠져 길버트와 절교했던 앤이 길버트의 진실된 마음을 깨닫고 친구가 되는 장면.

나이들고 홀로 남은 마틸다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남기로 한 모습.

하나하나 너무 감동적이었다.

어렸을 때에는 여러가지 상황으로 앤이 대학을 포기했던 게 너무 아쉬웠는데

지금은 앤이 참 현명한 선택을 했구나. 앤은 이후에도 정말 행복했겠구나 싶어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딸아이가 좀 더 크면 이 책을 재미있게 읽겠지.

내가 나이가 좀 더 든 이후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면 또 어떤 감동을 느낄까.

빨강머리 앤, 오래오래 내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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