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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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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의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이 의아했다. 읽고 난 다음 이해할 수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프랑스 지방 도시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동성애자 지식인이었으며, 그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고백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트렌디한 지식인들이 좋아할 만한 책이었다. 나쁜 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알라딘 서점에서는 21세기 최고의 책들 중 한 권으로 추천되었고,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2021년도에도 여러 일간지에서 동시에 추천도서로 올라왔다는 점에서, 과연 이 책이 한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얼마나 가치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한국의 독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고민하고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고민한단 말인가! 더 나아가 성정체성을 고민해서 이성애자가, 아, 나는 게이였어 라든가 아, 나는 양성애자였어라고 고백하게 될까. 아니면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어떤 이가 우연히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각성하고 난 다음,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다거나 사회주의 혁명전사가 되거나, 철지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도 되어야 할까? 도대체 이 책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기에, 최고의 책이 되고 추천도서가 되는 걸까? (이 책보다 지금 여기 한국의 독자들에게 권해야 하는 정말 중요한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2.

최근에 개인적으로 알게 된 이들은 나와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다. 하지만 너무 단순하다. 지적 역량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나, 그럴 기회가 애초에 없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해선 매우 영악하고 돈에 민감하다(이건 내가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한 역량이다).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대부분 그렇듯이 적절하게 선하고 적절하게 악하다. 그리고 난 다음, 단순한 질문이 떠올랐다. 유튜브를 보면 중도나 진보 쪽에 있는 이들이 나와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저 이야기를 듣고 일반 사람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실은 사용하는 단어부터 제법 좋은 대학을 나와 책 좀 읽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였고 문장이었다. 나에겐 매우 익숙한 단어들이지만, 누군가들에겐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미국 민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것은 너무 진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한국의 진보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아젠다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이와 비슷하게 이 책도 그런 류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지향하는 노동자 운동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노총은 이미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노조들, 즉 규모가 있고 급여도 센 기업들의 강성 노조들이 차지한 정치 결사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중소기업이나 소기업들의 노동자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 심지어 기업체에서 짤려, 어쩔 수 없이 가게 사장님이 된 이들 조차 소외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한국의 노동자 계급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하지만 한 표 한 표가 아쉬운 정치인들은 이들 앞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지). 더 나아가 대기업 노조에 속한 노동자들이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급여 향상을 위해 자신들의 급여 인상 폭을 조정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길 희망한다. 그래야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 노동자 세상이 온다고 강력하게 믿는다.


이런 측면에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추천도서가 된 이유는 성정체성과 계급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도대체 한국 사회에서 성정체성과 계급 정체성이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건가. 도대체 이 책을 읽어서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왜 당신들은 이 책을 추천하는 것인가?


3.

내가 이 책을 추천한다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주 우연히 고등학교까지 진학했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깨달은 한 소년이 자신의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파리로 나와, 세계로 나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했으니, 당신도 그럴 수 있다고 희망을 안겨주어서 라고 할까. 아니면 프랑스나 한국이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으며, 한 때 우리가 선망했던 프랑스 지식인들도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굳이 유럽의 지식인들을 부러워할 필요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추천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런 측면에서보자면, 추천할 만한 책들이 널려있을 텐데 말이다.


초반부터 좀 삐딱하게 썼는데, 나는 추천할 만한 무수한 책들을 두고 이 책을 추천한 이들에겐 일종의 보이지 않는 겉멋이나 허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긴 나도 이런 겉멋이나 허위를 가지고 있었으니,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4.

내가 보기에는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은 있는 그 자체로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특권층 인사가 내놓은 순진한 고백인 것이다. 나는 이 인물을 평생 딱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즉각적인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아롱을 보며서, 그의 번지르르한 웃음, 들척지근한 목소리, 신중하고 합리적인 성격인 양 과시하는 방식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상 품위와 이데올로기적 중용이라는 그의 부르주아적 에토스를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112쪽 ~ 113쪽)


레이몽 아롱에 대한 디디에 에리봉의 비판은 상당히 직설적이고 흥미로웠다. 하긴 레이몽 아롱에 대한 프랑스 내 좌파들의 비판은 유명했으니. 다만 에리봉의 저 비판도 그런 맥락을 같이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젠 레이몽 아롱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으니, 읽는 이들도 없겠지만.


그런데 여기서 나는, 민중 계급이 겪는 교육 체계로부터의 체계적 배제라든지, 그러한 매커니즘의 힘에 의해 민중 계급에 운명지어진 사회적 열등성과 분리의 상황과 같은 통계적 현실도 다르게 해석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제도 속에 감춰진 기능이나 악의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사회적 음모론에 물들어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것은 정확히 부르디외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 개념을 질책하며 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개념이 “최악의 것을 향한 기능주의”라는 관점에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기구가 “어떤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사악한 기계”가 된다고 쓰고는, “이러한 공모에 대한 환상, 사회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 악막적 의지가 책임이 있다는 관념이 비판적 사유를 사로잡고 있다”고 덧붙인다. 아마도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개념이 우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오래된 극작술 - 혹은 오래된 말잔치 - 로 몰아넣는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37쪽 - 138쪽) 


부르디외의 비판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알튀세르의 저 이론은 생각할수록 너무 기계적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제대로 분석하여 이야기한 걸 읽지 못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윤소영 한신대 교수는 지난 대선 때 윤석열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파시즘을 막기 위해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자와 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운동권이든 좌파 지식인이든 파시스트는 막아야 하니 윤석열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


5.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왔다. 그녀와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과의 화해, 내가 거부하고 내쫓고 부인했던 나 자신의 어떤 부분과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13쪽)


나는 도시를 떠난 전형적인 게이의 여정을 따랐다. 새로운 사회성의 네트워크 안에 자리 잡고 게이들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게이로서 발명하고, 게이로서의 삶을 배워나가는 여정 말이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사회적 여정을 따랐는데, 흔히 '계급탈주자 transfuges de classe'라고 일컬어지는 부류의 여정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탈주자' 중 하나였다. 그러한 이들은 거의 반 영구적인 동시에 의식적으로 자신의 출신 계급에 거리를 두고, 자신이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관심을 쏟기 마련이다. (27쪽)


과거의 단절, 혹은 탈출은 익숙한 테마이긴 하지만, 프랑스 지식인의 회고로 접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제 3세계에 속했던 한국에서 자란 나로선 다소 의외였다. 그 땐 무조건 선진국, 선진국 했으며, 한국은 이류라고 믿었고 강요당했던 때였으니.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도망쳤다.


나는 의무 교육 연력이 16세까지로 연장되었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분개했는지 기억한다. "뭣 하러 애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계속하게 만드는 거야? 애들은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이러한 '취향', 아니 공부에 대한 '무취향'이 얼마나 차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지를 전혀 의문시하지 않고, 사람들은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54쪽)


하긴 가난했던 까뮈를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그의 선생은 까뮈의 집으로 가서 까뮈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설득했으니. 어쩌면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이상한 종류에 가까울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문화 자본으로 계급을 나눌 수 있다는 건 이러한 프랑스적 상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 초반 디디에 에리봉의 아버지가 '혁명'을 이야기하다가 책 후반부엔 우파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정치 성향과 실제 대중이 고려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 이는 프랑스나 한국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서구 사회, 특히 유럽이 겪는 많은 문제들이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더 심각한 형태로 나타날 지 모르니, 준비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기에("이건 전부 의도된 거야"), '혁명'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에 그렇게나 많은 불행을 초래한 사악한 힘 - 우파, '부자놈들', '거물들' - 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 - 하나의 신화에 맞서는 또 다른 신화 - 인 양 소환되었다. (47쪽)


퀸 슬로보디언은 <<크랙업 캐피탈리즘>>에서 '구역(zone)이 나누어지는 자본주의'를 이야기했다. 경제적 능력이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사회적, 정치적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정말 많은 책에서 이렇게 떠들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갈등을 부추기는 행동을 하고 그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 정치 탓, 언론 탓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아파트 커뮤니티 단톡방에 들어와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은 아파트 이기주의를 조장하는 발언을 하고 천천히 사람들이 휩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부부와 가족의 구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고 나쁨을 떠나 복잡성, 다양성, 절연, 잇단 선택, 재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 ('동거하는' 남녀, '배다른' 아이들, 이혼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사는 유부남, 유부녀 등등) (77쪽)


경제적 불평등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해결된 적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어떤 불평등이 있고, 그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역사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그리고 후자는 대체로 격변기이거나 막 격변기를 거쳐온 시기가 될 것이다. 우파들은 경제적 불평등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 불평등의 원인을 말로 설명하기도,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구조적 문제나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이민자, 혹은 난민의 문제로 몰아간다. 이는 한국의 극우들이 '중국인'을 들먹이는 것과 동일하다. 이런 뻔한 거짓말에 일부 사람들이 넘어간다는 걸 나로선 도저리 이해할 수 없지만, 이것이 나이든 일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최근 몇 년을 겪어오면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아베세데르 L'Abe'ce'daire>에서 질 들뢰즈는 "좌파라는 것"은 "먼저 세계를 내다보는 것", "멀리 내다보는 것"(우리 동네의 문제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제 3세계의 문제를 긴급한 사안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반대로 "좌파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46쪽)


하지만 질 들뢰즈처럼 되지는 말자. 저 구분은 너무 형편이 없어서, 눈 앞의 해결 가능한(그러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참여가 필요한) 어떤 이슈에는 무관심해지면서, 반대로 마치 선량하고 정의에 불타는, 지적인 코스모폴리탄이 된 양 행동하는 겉멋 좌파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책에서 얻은 개념이었고 추상적인 관념이었다. 부모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소외된 노동자'와 '계급 의식'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개탄하는데 만족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 '혁명에 입각한' 정치적 판단이 내가 부모님과 가족에 대해 내리는 사회적 판단과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사회적인 탈동일시de'sidentification의 벡터였다. 실제의 노동자들에게서 더 잘 멀어지기 위해 '노동계급'을 예찬한 것이다. (99쪽)


디디에 에리봉의 고백은 일부 독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는 자신의 배경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멀어지기 위해 좌파가 된 것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게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translation"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 (204쪽)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졌던 의문인데, 왜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것일까. 실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특히 나에게 있어서 이 둘은 명확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나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을 좋아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는 매우 싫어하는 구석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한국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재직자들과 자영업자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거나 관련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우파에서는 나를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과거부터 있었던 불평등이나 지배/피지배의 구조가 바뀐 건 아니다. 그저 변화된 것일 뿐. 하긴 이 변화만으로도 사회는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 개선만큼 사회의 구조적 문제는 더 해결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매 페이지에서 나 역시 경험했던 것들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고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어떤 감정에 전율한다. 푸코가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는 안다. 그는 몇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고, 오랫동안 이성과 광기를 가르는 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려 천천히 나아갔다(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했다. 푸코는 '불행'에게서 자신의 형제를 알아보았다고). 푸코는 자발적 유배를 통해(처음은 스웨덴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의학적 병리화라는 유사과학적 담론을 급진적으로 문제화하는 끈기 있는 노동을 통해 간신히 궁지에서 벗어났다. (252쪽)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지만, 읽긴 쉽지 않다. 저자 스스로도 자신의 불합리한 면들을 이야기하며 고백하지만, 그 고백적 서사가 한국 사회에 어떤 것들을 시사하는 것일까. 지적 호기심이라는 측면에서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그 뿐이다.? 나는 이 책이 일반 독자들에게 권하는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실천적 행동을 요구하는 기후 위기에 대한 책이나 정치적 편견들이 가져다 주는 위험성이나 경제적 불평등으로 야기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책들은 추천되지 않고 프랑스 게이 지식인의 고백담이 추천되는 걸 보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지적 허영이 아직도 상당히 심각하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하긴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무수한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구조주의'를 팔아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던 나 또한 그 부류로 인식되는 걸 보면서 도대체 이건 무슨 상황인가 반문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것이다. 디디에 에리봉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서 나는 가난한 지역에서 못 배운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람이예요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 고백이 얼마나 어려웠던 것일까. 다행히 아직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지만, 아마 어쩌면서 수십년이 지난 후엔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지식인이 나올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미 시작되었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너무 심해지고 있으니...


노동자의 자식은 자신이 노동 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111쪽)


* 서평이라고 적긴 했지만, 너무 두서 없이 적었다.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는 직업적 서평가도 아니고 이젠 그냥 책읽기 좋아하고 가끔 글을 쓰는 아저씨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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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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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구독하지 않는 주간지에서 손열음의 칼럼을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문장은 그녀를 처음 만나더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음악가(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콘스트 피아니스트')가 쓴 음악(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그런지 음악 평론가나 애호가가 쓴 책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할까, 흥미롭다고 할까. 

 

** 

 

그렇다면 상대 음감이란 무엇인가? 제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절대음감의 반대가 상대음감이다. 한마디로 절대음감이 없는 상태. 절대음감의 소유자가 1만 명 중 하나라는 통계가 맞다면 상대음감은 1만 명 중 9999명이라는 소린데 ….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나 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곤 말할 수 없는 능력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상대음감인 D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의 화성 진행에 대해 얘기하기 전까지는 거의 그렇게 알고 있었다. 물론 음악 천재들 중에서도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 내가 <나비야>의 첫 네마디를 ‘C코드-G코드-C코드-G코드’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음감인 D는 ‘1도-5도-1도-5도’로 이해하는 거다. 
이참에 상대음감이었다는 작곡가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지극히 주관적인 음악을 쓴 슈만, 완벽한 지성미로 빈틈없이 무장한 라벨,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대신 극도의 긴장감을 유별하는 바그너. 하나같아 화성 진행의 귀재들이었다. (28쪽-30쪽)

 

나는 반대로 절대음감을 절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소리만 듣고 음을 어떻게 바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음악가들은 모두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절대음감을 가진 이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이랄까. 그런데 상대음감을 가진 이들 중에도 뛰어난 음악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악기를 다루는 거 하나 없고,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라 여겼던 내가 클래식 음악을 꾸준히 듣고 있는 걸 보면 음악이 뭔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절대음감이나 상대음감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참에 '상대음감 작곡가와 연주자' 모음 음반 같은 것이 나오면 어떨까. 

 

** 

 

또 다른 친구 I는 ‘실수가 없는 실황음악은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까지 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대에서 실수하는 순간이 짜릿하다며, 하여간 통계적으로도 안 틀린 연주가 잘 된 연주는 아닐 테다.(37쪽)

 

예전에 음대생들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연주회 이야기를 하는데, 연주회가 끝난 다음 조용히 와서 어느 소절에서 음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연주자가 피아노 건반을 잘못 누른 것이다. 연주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실수한 것이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상대음감인 내가!), 그들은 상당히 악의적이지만 틀린 건 맞으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일부러 그런 행위를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풍문이. 


 
 

실황 연주에서의 실수는 어느 정도 감안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레코드(음반)이 나온 다음부터 연주자들은 이런 실수에 상당히 민감해질 수 없었다고 한다.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음반 녹음을 피하거나 반대로 연주회를 피하는 음악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야기지만, 아마 음반이라는 개념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부수적인 것으로 사라지거나. 다들 온라인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음반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 *

 

무조음악이란 말 그대로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음렬주의란 음, 음의 세기, 또는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들을 일련의 음렬에 따라 한 번씩 순서대로 쓰는 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구습을 버리고 ‘도-파#-시b-솔#-레’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음계를 만들어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60쪽)

 

아도르노(T.W.Adorno)의 음악 관련 책을 읽으면 온통 무조음악이나 음렬주의 이야기다. 쇤베르크(Schonberg)에 너무 경도된 아도르노.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적 분위기를 너무 싫어한 아도르노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에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들에 대해선 색안경을 끼고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손열음은 무조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까. 듣기도 힘든데, 연주하기란... 

 

* * 

 

프로코피예프(S. Prokofiev)는 ‘공상’의 작곡가다. 동시대 동향 출신의 가장 걸출한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가 현실과의 정면 승부를 표명했다면 프로코피예프는 정반대로 무한의 에스카피즘을 그렸다. 20대에 작곡한 <덧없는 환영 Op.22>는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사고구조다. 이 작품은 1분을 넘길까 말까 하는 스무 개의 소곡들을 묶어놓은 모음곡으로,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이며, 신나지만 왠지 괴로운 모티브들이 현실세계에 전혀 발을 담그지 않은 듯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94쪽)

 

프로코피예프 음반이 집에 여러 장 있지만, 몇 번 시도하다가 멈추었다. 쉽지 않다. 아래는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Op.16>에 대한 설명이다.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 프로코피예프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던 그가 스스로 목숨은 끊은 후, 그를 생각하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의 나는 단지 반쪽이었을 뿐, 나머지 반쪽은 막스였다"라고 일기에 적을 정도였던. 


 
 

‘카덴차’란 독주자나 독창자가 주로 악장이 끝나기 직전 잠깐동안 혼자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 카덴차가 제시부가 끝나자마자 등장한다. 피아노에만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술들과 당시로선 생소하기 그지 없던 온갖 불협화음이 혼재된 장장 5분이 넘는 이 카덴차는, 젊은 작곡가에게 닥친 절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44쪽)

 

* * 

 

이 책이 여느 책과 다른 점은 음악가, 연주자의 입장에서 작품과 작곡가을 대하는 것이다. 애호가인 우리는 그저 좋은 연주나 음악을 듣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연주자는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고민하기 때문에 다소 다르다고 할까. 이는 다른 예술 장르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문학이나 미술도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가 좋아하는 예술가는 따로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기술적으로 정복당하지 않은 최후의 난곡을 우리 음악가들은 안다. ‘음악가들은 안다’고 한 건, 정말이지 음악가들 말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그 곡이 뭔지 정답부터 말하겠다. 답은, 슈베르트의 기악곡들이다. (125쪽)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 * 

마치 세계를 뽑아내는 듯한 작업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다음으로 넘어갈까? 여기 piu(조금) lento는 무슨 뜻일까?” “조금 더 느리게 … …” “물론 그렇지. 그럼 얼마나 더 느리게 연주하면 될까?” 어느 정도로 느려야 하느냐니, 그것도 당연히 연주자의 마음인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조금 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좋은 연주자라면, 쇼팽이 무엇을 의도한 건지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내 말이 그거였다. 어떻게? 
-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166쪽)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만큼 투자를 필요로 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혹은 노력이든. 음악을 좋아하는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자주 사람들에게 권한다. 책 읽기보다 훨씬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찾으면 너무 좋은 연주가 많이 올라와있고 몇 만원 짜리 진공관이 들어간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면 집 분위기는 한결 달라질 테니, 그 사이 마음은 가라앉고 평온해질 테니. 


 
 

날쌘 음표들이 똑똑한 화성들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하이든의 곡임을 짐작하고, 비슷하긴 한데 훨씬 더 성악적인 멜로디에 극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 그건 모차르트임을, 거기에 반음계적 선율과 화성이 더해지고 가벼움이 더해지면 멘델스존임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이미 그들 고유의 언어와 어법을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 작품들이 빚어내는 일련의 이미지로 작곡가를 유추해 내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나 클래식을 꽤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하셔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곡가들의 어법뿐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 이해해주는 셈이 될 테니. 나만의 시각으로 그 내용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만들어본다면 ... 베토벤은 '자유에의 쟁취', 슈베르트는 '절망 속의 희망', 슈만은 '사랑', 쇼팽은 '그리움', 브람스는 '결핍', 차이콥스키는 '꿈', 쇼스타코비치는 ... '고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키워드를, 나는 '귀소본능'이라 하겠다. (94쪽) 

 

아직까지 저 수준은 안 되니, 한참을 더 들어야겠구나. 

 

우리 대부분은 시쳇말로 ‘타고난’ 재능을 아주 어려서부터 발견 ‘당해’ 이 일을 시작했고, 그저 이것만이 길인 줄 알고 해왔다. (289쪽)

 

위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천재 음악가들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까지도. 나는 손열음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 조성진의 연주보다 손열음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다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미술처럼 좋아하는 작품으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듯이 음악도 그러할 테니 말이다. 

 

이 책, 권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면,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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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시집 한 권이 있는데, 서가 어디에 꽂혀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래 전집은 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기 위해 옮겨놓는다.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21


올해 20권짜리 〈미당 서정주 전집〉이 나왔다. 이 결정본 전집을 만든 간행위원들은 미당이 쓴 친일 부역 작품을 모조리 누락했다. 세월은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작품만을 걸러놓는다.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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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미학 - 성장과 이익창조로 완성한
존 로버츠 지음, 이희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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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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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선택 -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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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 삶의 길잡이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expectation’을 의미하지 필연necessity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04쪽) 




1.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그동안 읽지 못했다.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해 받지 않고 독서에 집중할 시간도, 장소도, 여유도 없었다(바쁜 직장인의 삶이란!). 띄엄띄엄 읽어도 되는 책이야 지하철 안에서, 출근해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읽을 책도,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밑줄도 긋고 노트를 하며 심지어 읽던 부분을 두 세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감동하면서 한 번은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이젠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단어를 일상 대화에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이들도 주위에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이도 없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한동안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사로잡으며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주제였다. 철학사를 이제 갓 접한 이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항으로 두는 것처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양식style의 문제로만 파악한다면 우리는 예술의 역사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저자는 다섯 권으로 된 예술사를 펴냈지만, 그 다섯 권짜리 예술사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두 개의 철학과 그 철학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다섯 권짜리 예술사를 읽는다면, 더 깊은 감동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예술사는 양식사로만 이해되는 학문이 아니라(한국에 나온 대부분의 책들이 양식사들이며, 그것이 마치 예술사(혹은 미술사)의 정수로 이해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철학, 역사,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다. 



2.

버클리의 이러한 통찰은 지극히 혁신적이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 double slits experiment’은 대상이 피인식상태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1927년의 데이비슨 거머 실험 The Davisson-Germer’s experiment에 의해서 입증된다. 관찰되는 대상은 존재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95쪽) 



“존재는 피인식이다 Esse est Percipi”, 다시 말해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버클리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현대물리학(양자역학)을 끌고 들어와서 설명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한 때 철학자들은 기하학자들이면서 과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양 철학 수업 뿐만 아니라 철학전공수업에서 기하학(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과학철학 시간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학문과 학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철학사에서의 쟁점은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다. 인간 이성의 존재 여부와 그 역량의 범위에 대한 견해가 이념과 세계관을 가른다. 이 쟁점은 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 구조물과 삶의 양식과 세계관 모두에 미친다. 여기에 있어서 가치 중립적인 것은 없다. 심지어는 수학과 과학조차도 이 쟁점에 준한다. 철학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소피스트, 실재론과 유명론,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과 분석철학 등이 이 쟁점의 양쪽 진영을 차지한다. 전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진 낙관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철학이라면 후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인 철학이다. 후자는 단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인식만을 지식으로 간주한다. 

예술사에서의 환각주의는 전자와 맺어진다. 물론 모든 전자의 이념이 환각주의를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자는 환각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을 구성한다. 중세의 실재론은 오거스틴에서 보에티우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주도적이고 긴 계보를 가진다. 이 철학자들은 모두 인간 이성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내내 회화는 정면성의 원리를 따랐다. 이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존재와 역량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거기에 독자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이성은 신의 이성에 종속된 것이었다. 오거스틴은 인간의 올바른 지식은 오로지 신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219쪽)



이 책의 요약으로 적절해 보이는 위 인용문에서도 수학과 과학조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 현대 예술, 현대 물리학이 어떻게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면 놀라울 것이다(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큰 도전이며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하학을 이야기하며 예술사와 과학사를 오간다. 철학사의 쟁점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우리 문명을 어떻게 이루어왔는가를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나왔을 때 그것이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한다. 고대의 운동과 근대의 운동은 결정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운동이란 내부에서 운동의 목적이 있어야 했음을.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수학적으로 타당할 진 모르나,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테제였음을 완곡하게 설명한다. 



3.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철학의 선택>>은 실재론과 유명론을 오가며 오컴, 흄,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을 지나가며 현대가 마주하고 궁극적으로 취하게 되는 두 가지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보편개념)이 있느냐 없느냐(실재론과 유명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질문이다. 그것으로 시작하여 우리 인간의 모든 사유와 문화, 학문은 큰 줄기를 형성한다. 심지어 우리 개개인의 삶의 방향까지도. 그리고 저자는 그 경향들 사이에 서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지 묻는다. 솔직히 자유의지의 문제는 현대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쌓아가고 있는 요즘 내가 맞닥뜨린 것이기도 하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개화는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에 있게 된다. 문제는 이 인과율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과관계가 규정하는 법칙에서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인간 역시도 그 법칙에 말려든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증발한다. (247쪽)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결정된 운동만 존재한다. 현대물리학에서 규정짓는 바, 궁극적인 인과율의 모습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진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진짜였다. 현대 물리학과 현대 예술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이 책의 절정은 키르케고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4.

키르케고르의 개별자, 주체, 절망despair, 단독자, 자유의지는 모두가 같은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오로지 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개별자이다. 그리고 개별자이므로 집단이 아닌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임이 절망과 불안의 근원이다. 자신의 고독, 무지, 불안을 잠재워 줄 지적 목적과 위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이성이 전부라는 전통적인 전제에서라면 이제 인간은 무상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이성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와 고결함은 이 죽음을 기반으로 하여 되살아날 수 있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갱신하는 신앙으로 밀어 넣으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은총을 입은 존재가 된다. (275쪽 ~ 276쪽) 



철학을 공부하든, 예술작품을 보며 감동을 받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든, 우리 앞에 놓인 이 불확실하고 목적 없는 일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과감하게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저자는 보편개념이 존재하고 이성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어떤 철학들과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고 이성은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언어의 괴상망측함the awkwardness of our language'라고 하며 인과율(기하학)은 일종의 관습(습관)이라고 보는 어떤 철학들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의 사건에서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에 있는 미래의 사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인과율(과학)에 대한 믿음은 곧 미신이다.” - 비트겐슈타인 



결국 우리도 어떤 선택을 한다. 적어도 제대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우리가 왜 태어났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물었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는,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그 순간. 


그러나 이 절망이란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부딪혔던 그 절망이며,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했던 그 절망이다. 윌리엄 오캄은 그것을 절망이라 하지 않았고 신앙이라 믿었다. 흄은 그것을 절망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경멸하며 솔직하게 살라고 강변했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다. 적어도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을 테니 말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영속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의 소멸이라고 간주한다면 영원은 당연히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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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 2024-11-30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도 멋진 리뷰. 감탄 또 감탄. 이 책이 누구를 위한 건지 보여주는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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