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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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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구독하지 않는 주간지에서 손열음의 칼럼을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문장은 그녀를 처음 만나더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음악가(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콘스트 피아니스트')가 쓴 음악(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그런지 음악 평론가나 애호가가 쓴 책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할까, 흥미롭다고 할까. 

 

** 

 

그렇다면 상대 음감이란 무엇인가? 제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절대음감의 반대가 상대음감이다. 한마디로 절대음감이 없는 상태. 절대음감의 소유자가 1만 명 중 하나라는 통계가 맞다면 상대음감은 1만 명 중 9999명이라는 소린데 ….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나 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곤 말할 수 없는 능력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상대음감인 D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의 화성 진행에 대해 얘기하기 전까지는 거의 그렇게 알고 있었다. 물론 음악 천재들 중에서도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 내가 <나비야>의 첫 네마디를 ‘C코드-G코드-C코드-G코드’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음감인 D는 ‘1도-5도-1도-5도’로 이해하는 거다. 
이참에 상대음감이었다는 작곡가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지극히 주관적인 음악을 쓴 슈만, 완벽한 지성미로 빈틈없이 무장한 라벨,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대신 극도의 긴장감을 유별하는 바그너. 하나같아 화성 진행의 귀재들이었다. (28쪽-30쪽)

 

나는 반대로 절대음감을 절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소리만 듣고 음을 어떻게 바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음악가들은 모두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절대음감을 가진 이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이랄까. 그런데 상대음감을 가진 이들 중에도 뛰어난 음악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악기를 다루는 거 하나 없고,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라 여겼던 내가 클래식 음악을 꾸준히 듣고 있는 걸 보면 음악이 뭔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절대음감이나 상대음감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참에 '상대음감 작곡가와 연주자' 모음 음반 같은 것이 나오면 어떨까. 

 

** 

 

또 다른 친구 I는 ‘실수가 없는 실황음악은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까지 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대에서 실수하는 순간이 짜릿하다며, 하여간 통계적으로도 안 틀린 연주가 잘 된 연주는 아닐 테다.(37쪽)

 

예전에 음대생들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연주회 이야기를 하는데, 연주회가 끝난 다음 조용히 와서 어느 소절에서 음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연주자가 피아노 건반을 잘못 누른 것이다. 연주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실수한 것이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상대음감인 내가!), 그들은 상당히 악의적이지만 틀린 건 맞으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일부러 그런 행위를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풍문이. 


 
 

실황 연주에서의 실수는 어느 정도 감안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레코드(음반)이 나온 다음부터 연주자들은 이런 실수에 상당히 민감해질 수 없었다고 한다.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음반 녹음을 피하거나 반대로 연주회를 피하는 음악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야기지만, 아마 음반이라는 개념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부수적인 것으로 사라지거나. 다들 온라인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음반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 *

 

무조음악이란 말 그대로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음렬주의란 음, 음의 세기, 또는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들을 일련의 음렬에 따라 한 번씩 순서대로 쓰는 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구습을 버리고 ‘도-파#-시b-솔#-레’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음계를 만들어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60쪽)

 

아도르노(T.W.Adorno)의 음악 관련 책을 읽으면 온통 무조음악이나 음렬주의 이야기다. 쇤베르크(Schonberg)에 너무 경도된 아도르노.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적 분위기를 너무 싫어한 아도르노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에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들에 대해선 색안경을 끼고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손열음은 무조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까. 듣기도 힘든데, 연주하기란... 

 

* * 

 

프로코피예프(S. Prokofiev)는 ‘공상’의 작곡가다. 동시대 동향 출신의 가장 걸출한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가 현실과의 정면 승부를 표명했다면 프로코피예프는 정반대로 무한의 에스카피즘을 그렸다. 20대에 작곡한 <덧없는 환영 Op.22>는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사고구조다. 이 작품은 1분을 넘길까 말까 하는 스무 개의 소곡들을 묶어놓은 모음곡으로,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이며, 신나지만 왠지 괴로운 모티브들이 현실세계에 전혀 발을 담그지 않은 듯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94쪽)

 

프로코피예프 음반이 집에 여러 장 있지만, 몇 번 시도하다가 멈추었다. 쉽지 않다. 아래는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Op.16>에 대한 설명이다.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 프로코피예프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던 그가 스스로 목숨은 끊은 후, 그를 생각하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의 나는 단지 반쪽이었을 뿐, 나머지 반쪽은 막스였다"라고 일기에 적을 정도였던. 


 
 

‘카덴차’란 독주자나 독창자가 주로 악장이 끝나기 직전 잠깐동안 혼자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 카덴차가 제시부가 끝나자마자 등장한다. 피아노에만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술들과 당시로선 생소하기 그지 없던 온갖 불협화음이 혼재된 장장 5분이 넘는 이 카덴차는, 젊은 작곡가에게 닥친 절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44쪽)

 

* * 

 

이 책이 여느 책과 다른 점은 음악가, 연주자의 입장에서 작품과 작곡가을 대하는 것이다. 애호가인 우리는 그저 좋은 연주나 음악을 듣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연주자는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고민하기 때문에 다소 다르다고 할까. 이는 다른 예술 장르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문학이나 미술도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가 좋아하는 예술가는 따로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기술적으로 정복당하지 않은 최후의 난곡을 우리 음악가들은 안다. ‘음악가들은 안다’고 한 건, 정말이지 음악가들 말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그 곡이 뭔지 정답부터 말하겠다. 답은, 슈베르트의 기악곡들이다. (125쪽)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 * 

마치 세계를 뽑아내는 듯한 작업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다음으로 넘어갈까? 여기 piu(조금) lento는 무슨 뜻일까?” “조금 더 느리게 … …” “물론 그렇지. 그럼 얼마나 더 느리게 연주하면 될까?” 어느 정도로 느려야 하느냐니, 그것도 당연히 연주자의 마음인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조금 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좋은 연주자라면, 쇼팽이 무엇을 의도한 건지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내 말이 그거였다. 어떻게? 
-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166쪽)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만큼 투자를 필요로 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혹은 노력이든. 음악을 좋아하는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자주 사람들에게 권한다. 책 읽기보다 훨씬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찾으면 너무 좋은 연주가 많이 올라와있고 몇 만원 짜리 진공관이 들어간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면 집 분위기는 한결 달라질 테니, 그 사이 마음은 가라앉고 평온해질 테니. 


 
 

날쌘 음표들이 똑똑한 화성들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하이든의 곡임을 짐작하고, 비슷하긴 한데 훨씬 더 성악적인 멜로디에 극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 그건 모차르트임을, 거기에 반음계적 선율과 화성이 더해지고 가벼움이 더해지면 멘델스존임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이미 그들 고유의 언어와 어법을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 작품들이 빚어내는 일련의 이미지로 작곡가를 유추해 내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나 클래식을 꽤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하셔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곡가들의 어법뿐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 이해해주는 셈이 될 테니. 나만의 시각으로 그 내용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만들어본다면 ... 베토벤은 '자유에의 쟁취', 슈베르트는 '절망 속의 희망', 슈만은 '사랑', 쇼팽은 '그리움', 브람스는 '결핍', 차이콥스키는 '꿈', 쇼스타코비치는 ... '고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키워드를, 나는 '귀소본능'이라 하겠다. (94쪽) 

 

아직까지 저 수준은 안 되니, 한참을 더 들어야겠구나. 

 

우리 대부분은 시쳇말로 ‘타고난’ 재능을 아주 어려서부터 발견 ‘당해’ 이 일을 시작했고, 그저 이것만이 길인 줄 알고 해왔다. (289쪽)

 

위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천재 음악가들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까지도. 나는 손열음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 조성진의 연주보다 손열음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다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미술처럼 좋아하는 작품으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듯이 음악도 그러할 테니 말이다. 

 

이 책, 권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면, 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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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의 시집 한 권이 있는데, 서가 어디에 꽂혀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래 전집은 사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두기 위해 옮겨놓는다.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21


올해 20권짜리 〈미당 서정주 전집〉이 나왔다. 이 결정본 전집을 만든 간행위원들은 미당이 쓴 친일 부역 작품을 모조리 누락했다. 세월은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작품만을 걸러놓는다.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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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미학 - 성장과 이익창조로 완성한
존 로버츠 지음, 이희문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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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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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선택 -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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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 삶의 길잡이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expectation’을 의미하지 필연necessity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04쪽) 




1.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그동안 읽지 못했다.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해 받지 않고 독서에 집중할 시간도, 장소도, 여유도 없었다(바쁜 직장인의 삶이란!). 띄엄띄엄 읽어도 되는 책이야 지하철 안에서, 출근해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읽을 책도,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밑줄도 긋고 노트를 하며 심지어 읽던 부분을 두 세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감동하면서 한 번은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이젠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단어를 일상 대화에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이들도 주위에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이도 없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한동안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사로잡으며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주제였다. 철학사를 이제 갓 접한 이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항으로 두는 것처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양식style의 문제로만 파악한다면 우리는 예술의 역사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저자는 다섯 권으로 된 예술사를 펴냈지만, 그 다섯 권짜리 예술사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두 개의 철학과 그 철학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다섯 권짜리 예술사를 읽는다면, 더 깊은 감동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예술사는 양식사로만 이해되는 학문이 아니라(한국에 나온 대부분의 책들이 양식사들이며, 그것이 마치 예술사(혹은 미술사)의 정수로 이해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철학, 역사,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다. 



2.

버클리의 이러한 통찰은 지극히 혁신적이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 double slits experiment’은 대상이 피인식상태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1927년의 데이비슨 거머 실험 The Davisson-Germer’s experiment에 의해서 입증된다. 관찰되는 대상은 존재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95쪽) 



“존재는 피인식이다 Esse est Percipi”, 다시 말해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버클리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현대물리학(양자역학)을 끌고 들어와서 설명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한 때 철학자들은 기하학자들이면서 과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양 철학 수업 뿐만 아니라 철학전공수업에서 기하학(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과학철학 시간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학문과 학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철학사에서의 쟁점은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다. 인간 이성의 존재 여부와 그 역량의 범위에 대한 견해가 이념과 세계관을 가른다. 이 쟁점은 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 구조물과 삶의 양식과 세계관 모두에 미친다. 여기에 있어서 가치 중립적인 것은 없다. 심지어는 수학과 과학조차도 이 쟁점에 준한다. 철학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소피스트, 실재론과 유명론,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과 분석철학 등이 이 쟁점의 양쪽 진영을 차지한다. 전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진 낙관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철학이라면 후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인 철학이다. 후자는 단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인식만을 지식으로 간주한다. 

예술사에서의 환각주의는 전자와 맺어진다. 물론 모든 전자의 이념이 환각주의를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자는 환각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을 구성한다. 중세의 실재론은 오거스틴에서 보에티우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주도적이고 긴 계보를 가진다. 이 철학자들은 모두 인간 이성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내내 회화는 정면성의 원리를 따랐다. 이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존재와 역량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거기에 독자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이성은 신의 이성에 종속된 것이었다. 오거스틴은 인간의 올바른 지식은 오로지 신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219쪽)



이 책의 요약으로 적절해 보이는 위 인용문에서도 수학과 과학조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 현대 예술, 현대 물리학이 어떻게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면 놀라울 것이다(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큰 도전이며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하학을 이야기하며 예술사와 과학사를 오간다. 철학사의 쟁점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우리 문명을 어떻게 이루어왔는가를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나왔을 때 그것이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한다. 고대의 운동과 근대의 운동은 결정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운동이란 내부에서 운동의 목적이 있어야 했음을.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수학적으로 타당할 진 모르나,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테제였음을 완곡하게 설명한다. 



3.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철학의 선택>>은 실재론과 유명론을 오가며 오컴, 흄,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을 지나가며 현대가 마주하고 궁극적으로 취하게 되는 두 가지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보편개념)이 있느냐 없느냐(실재론과 유명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질문이다. 그것으로 시작하여 우리 인간의 모든 사유와 문화, 학문은 큰 줄기를 형성한다. 심지어 우리 개개인의 삶의 방향까지도. 그리고 저자는 그 경향들 사이에 서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지 묻는다. 솔직히 자유의지의 문제는 현대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쌓아가고 있는 요즘 내가 맞닥뜨린 것이기도 하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개화는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에 있게 된다. 문제는 이 인과율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과관계가 규정하는 법칙에서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인간 역시도 그 법칙에 말려든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증발한다. (247쪽)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결정된 운동만 존재한다. 현대물리학에서 규정짓는 바, 궁극적인 인과율의 모습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진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진짜였다. 현대 물리학과 현대 예술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이 책의 절정은 키르케고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4.

키르케고르의 개별자, 주체, 절망despair, 단독자, 자유의지는 모두가 같은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오로지 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개별자이다. 그리고 개별자이므로 집단이 아닌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임이 절망과 불안의 근원이다. 자신의 고독, 무지, 불안을 잠재워 줄 지적 목적과 위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이성이 전부라는 전통적인 전제에서라면 이제 인간은 무상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이성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와 고결함은 이 죽음을 기반으로 하여 되살아날 수 있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갱신하는 신앙으로 밀어 넣으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은총을 입은 존재가 된다. (275쪽 ~ 276쪽) 



철학을 공부하든, 예술작품을 보며 감동을 받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든, 우리 앞에 놓인 이 불확실하고 목적 없는 일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과감하게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저자는 보편개념이 존재하고 이성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어떤 철학들과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고 이성은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언어의 괴상망측함the awkwardness of our language'라고 하며 인과율(기하학)은 일종의 관습(습관)이라고 보는 어떤 철학들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의 사건에서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에 있는 미래의 사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인과율(과학)에 대한 믿음은 곧 미신이다.” - 비트겐슈타인 



결국 우리도 어떤 선택을 한다. 적어도 제대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우리가 왜 태어났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물었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는,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그 순간. 


그러나 이 절망이란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부딪혔던 그 절망이며,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했던 그 절망이다. 윌리엄 오캄은 그것을 절망이라 하지 않았고 신앙이라 믿었다. 흄은 그것을 절망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경멸하며 솔직하게 살라고 강변했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다. 적어도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을 테니 말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영속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의 소멸이라고 간주한다면 영원은 당연히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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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환의 그림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 우연스럽게 퐁티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현상학은 현대 회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철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나 이 철학은 너무 관념적이라, 철학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접근하기 너무 어렵다.

이우환의 그림과는 큰 관련성이 없다고 생각되나, 퐁티는 너무 매력적이다. 데카르트 - 훗설 - 퐁티, 퐁티와 사르트르, 훗설 - 퐁티 - 레비나스 - 데리다. 타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프로이드 - 라캉과도 연결지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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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탐구 프로그램에 대한 주석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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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대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이 책도 읽지 않고 현대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겠다. 나? 읽었는데, 너무 오래 전에 읽었다. 다시 읽어야지.
메를로 뽕띠의 살의 기호학
장문정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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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를로 퐁티 지음 / 서광사 / 198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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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와 무의미
모리스 메를로 퐁티 지음 / 서광사 / 199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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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무척 재미있다. 현재 읽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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