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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클래식 이야기
손열음 (Yeoleum Son)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지금은 구독하지 않는 주간지에서 손열음의 칼럼을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문장은 그녀를 처음 만나더라도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고 할까. 음악가(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콘스트 피아니스트')가 쓴 음악(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그런지 음악 평론가나 애호가가 쓴 책과는 상당히 결이 다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고 할까, 흥미롭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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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상대 음감이란 무엇인가? 제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절대음감의 반대가 상대음감이다. 한마디로 절대음감이 없는 상태. 절대음감의 소유자가 1만 명 중 하나라는 통계가 맞다면 상대음감은 1만 명 중 9999명이라는 소린데 …. 그렇다면 이것은 아무나 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곤 말할 수 없는 능력 아닌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상대음감인 D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의 화성 진행에 대해 얘기하기 전까지는 거의 그렇게 알고 있었다. 물론 음악 천재들 중에서도 절대음감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 내가 <나비야>의 첫 네마디를 ‘C코드-G코드-C코드-G코드’로 받아들인다면 상대음감인 D는 ‘1도-5도-1도-5도’로 이해하는 거다.
이참에 상대음감이었다는 작곡가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지극히 주관적인 음악을 쓴 슈만, 완벽한 지성미로 빈틈없이 무장한 라벨, 자연스럽지는 않지만 대신 극도의 긴장감을 유별하는 바그너. 하나같아 화성 진행의 귀재들이었다. (28쪽-30쪽)
나는 반대로 절대음감을 절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소리만 듣고 음을 어떻게 바로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음악가들은 모두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심지어 절대음감을 가진 이들은 마치 다른 행성에 사는 이랄까. 그런데 상대음감을 가진 이들 중에도 뛰어난 음악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악기를 다루는 거 하나 없고,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은 잠자는 시간이라 여겼던 내가 클래식 음악을 꾸준히 듣고 있는 걸 보면 음악이 뭔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절대음감이나 상대음감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쓴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 참에 '상대음감 작곡가와 연주자' 모음 음반 같은 것이 나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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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친구 I는 ‘실수가 없는 실황음악은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고까지 한다.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무대에서 실수하는 순간이 짜릿하다며, 하여간 통계적으로도 안 틀린 연주가 잘 된 연주는 아닐 테다.(37쪽)
예전에 음대생들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연주회 이야기를 하는데, 연주회가 끝난 다음 조용히 와서 어느 소절에서 음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연주자가 피아노 건반을 잘못 누른 것이다. 연주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실수한 것이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로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상대음감인 내가!), 그들은 상당히 악의적이지만 틀린 건 맞으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일부러 그런 행위를 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풍문이.
실황 연주에서의 실수는 어느 정도 감안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레코드(음반)이 나온 다음부터 연주자들은 이런 실수에 상당히 민감해질 수 없었다고 한다.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어느 부분에서 틀렸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예 음반 녹음을 피하거나 반대로 연주회를 피하는 음악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야기지만, 아마 음반이라는 개념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부수적인 것으로 사라지거나. 다들 온라인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로 음악을 듣는 시대에 음반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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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음악이란 말 그대로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음렬주의란 음, 음의 세기, 또는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들을 일련의 음렬에 따라 한 번씩 순서대로 쓰는 기법을 말한다. 쉽게 말해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구습을 버리고 ‘도-파#-시b-솔#-레’ 이런 식으로 새로운 음계를 만들어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60쪽)
아도르노(T.W.Adorno)의 음악 관련 책을 읽으면 온통 무조음악이나 음렬주의 이야기다. 쇤베르크(Schonberg)에 너무 경도된 아도르노. 문화산업(cultural industry)적 분위기를 너무 싫어한 아도르노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학자들에게 대중에게 인기 있는 음악가들에 대해선 색안경을 끼고 보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손열음은 무조음악을 연주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까. 듣기도 힘든데, 연주하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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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예프(S. Prokofiev)는 ‘공상’의 작곡가다. 동시대 동향 출신의 가장 걸출한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가 현실과의 정면 승부를 표명했다면 프로코피예프는 정반대로 무한의 에스카피즘을 그렸다. 20대에 작곡한 <덧없는 환영 Op.22>는 그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사고구조다. 이 작품은 1분을 넘길까 말까 하는 스무 개의 소곡들을 묶어놓은 모음곡으로,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이며, 신나지만 왠지 괴로운 모티브들이 현실세계에 전혀 발을 담그지 않은 듯한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다.(94쪽)
프로코피예프 음반이 집에 여러 장 있지만, 몇 번 시도하다가 멈추었다. 쉽지 않다. 아래는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 Op.16>에 대한 설명이다. 막시밀리안 슈미트호프. 프로코피예프의 가장 친했던 친구였던 그가 스스로 목숨은 끊은 후, 그를 생각하며 쓴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의 나는 단지 반쪽이었을 뿐, 나머지 반쪽은 막스였다"라고 일기에 적을 정도였던.
‘카덴차’란 독주자나 독창자가 주로 악장이 끝나기 직전 잠깐동안 혼자 연주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이 카덴차가 제시부가 끝나자마자 등장한다. 피아노에만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아예 발전부와 재현부를 모두 맡겨버린 것이다. 피아노란 악기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의 기술들과 당시로선 생소하기 그지 없던 온갖 불협화음이 혼재된 장장 5분이 넘는 이 카덴차는, 젊은 작곡가에게 닥친 절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담겨있다.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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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여느 책과 다른 점은 음악가, 연주자의 입장에서 작품과 작곡가을 대하는 것이다. 애호가인 우리는 그저 좋은 연주나 음악을 듣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연주자는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고민하기 때문에 다소 다르다고 할까. 이는 다른 예술 장르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문학이나 미술도 그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가 좋아하는 예술가는 따로 있다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누구에게도 기술적으로 정복당하지 않은 최후의 난곡을 우리 음악가들은 안다. ‘음악가들은 안다’고 한 건, 정말이지 음악가들 말곤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일단 그 곡이 뭔지 정답부터 말하겠다. 답은, 슈베르트의 기악곡들이다. (125쪽)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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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계를 뽑아내는 듯한 작업에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다음으로 넘어갈까? 여기 piu(조금) lento는 무슨 뜻일까?” “조금 더 느리게 … …” “물론 그렇지. 그럼 얼마나 더 느리게 연주하면 될까?” 어느 정도로 느려야 하느냐니, 그것도 당연히 연주자의 마음인데.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조금 더 느리게 연주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거잖아? 하지만 좋은 연주자라면, 쇼팽이 무엇을 의도한 건지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봐야지 않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내 말이 그거였다. 어떻게?
- 아리에 바르디와의 첫 레슨 (166쪽)
음악을 듣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만큼 투자를 필요로 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혹은 노력이든. 음악을 좋아하는 건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자주 사람들에게 권한다. 책 읽기보다 훨씬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찾으면 너무 좋은 연주가 많이 올라와있고 몇 만원 짜리 진공관이 들어간 블루투스 스피커 하나면 집 분위기는 한결 달라질 테니, 그 사이 마음은 가라앉고 평온해질 테니.
날쌘 음표들이 똑똑한 화성들과 함께 유머러스하게 진행되는 것으로 하이든의 곡임을 짐작하고, 비슷하긴 한데 훨씬 더 성악적인 멜로디에 극적인 분위기를 가졌으면 그건 모차르트임을, 거기에 반음계적 선율과 화성이 더해지고 가벼움이 더해지면 멘델스존임을 구분해 낼 수 있다면 이미 그들 고유의 언어와 어법을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더 나아가 이 작품들이 빚어내는 일련의 이미지로 작곡가를 유추해 내는 것까지 가능하다면 '나 클래식을 꽤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하셔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작곡가들의 어법뿐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내용까지 이해해주는 셈이 될 테니. 나만의 시각으로 그 내용들을 하나의 '키워드'로 만들어본다면 ... 베토벤은 '자유에의 쟁취', 슈베르트는 '절망 속의 희망', 슈만은 '사랑', 쇼팽은 '그리움', 브람스는 '결핍', 차이콥스키는 '꿈', 쇼스타코비치는 ... '고발'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키워드를, 나는 '귀소본능'이라 하겠다. (94쪽)
아직까지 저 수준은 안 되니, 한참을 더 들어야겠구나.
우리 대부분은 시쳇말로 ‘타고난’ 재능을 아주 어려서부터 발견 ‘당해’ 이 일을 시작했고, 그저 이것만이 길인 줄 알고 해왔다. (289쪽)
위 문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천재 음악가들의 삶이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것의 의미까지도. 나는 손열음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한다. 조성진의 연주보다 손열음의 연주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다 말았는데,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미술처럼 좋아하는 작품으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듯이 음악도 그러할 테니 말이다.
이 책, 권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한다면, 특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