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선택 -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
조중걸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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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은 삶의 길잡이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expectation’을 의미하지 필연necessity을 의미하지는 않는다.(104쪽) 




1.

책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그동안 읽지 못했다. 읽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방해 받지 않고 독서에 집중할 시간도, 장소도, 여유도 없었다(바쁜 직장인의 삶이란!). 띄엄띄엄 읽어도 되는 책이야 지하철 안에서, 출근해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읽을 수 있지만, 이 책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읽을 책도,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읽으면서 밑줄도 긋고 노트를 하며 심지어 읽던 부분을 두 세번 읽어야 한다. 한 번은 감동하면서 한 번은 다시 되새기기 위해서. 


이젠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단어를 일상 대화에서 사용할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이들도 주위에 없고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이도 없다. 하지만 이 단어들은 한동안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사로잡으며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주제였다. 철학사를 이제 갓 접한 이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대립항으로 두는 것처럼,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양식style의 문제로만 파악한다면 우리는 예술의 역사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저자는 다섯 권으로 된 예술사를 펴냈지만, 그 다섯 권짜리 예술사 책보다 이 책을 먼저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두 개의 철학과 그 철학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변주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다섯 권짜리 예술사를 읽는다면, 더 깊은 감동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에. 예술사는 양식사로만 이해되는 학문이 아니라(한국에 나온 대부분의 책들이 양식사들이며, 그것이 마치 예술사(혹은 미술사)의 정수로 이해되는 것이 안타깝지만), 철학, 역사, 수학과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학문이다. 



2.

버클리의 이러한 통찰은 지극히 혁신적이고 날카로운 것이었다. 토머스 영의 ‘이중 슬릿 실험 double slits experiment’은 대상이 피인식상태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1927년의 데이비슨 거머 실험 The Davisson-Germer’s experiment에 의해서 입증된다. 관찰되는 대상은 존재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95쪽) 



“존재는 피인식이다 Esse est Percipi”, 다시 말해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버클리의 철학을 설명하면서 현대물리학(양자역학)을 끌고 들어와서 설명할 때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한 때 철학자들은 기하학자들이면서 과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교양 철학 수업 뿐만 아니라 철학전공수업에서 기하학(수학)이나 상대성이론을 가르치지 않는다(과학철학 시간이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의 시대가 분화되고 전문화되어 학문과 학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철학사에서의 쟁점은 궁극적으로는 단 하나다. 인간 이성의 존재 여부와 그 역량의 범위에 대한 견해가 이념과 세계관을 가른다. 이 쟁점은 철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문화 구조물과 삶의 양식과 세계관 모두에 미친다. 여기에 있어서 가치 중립적인 것은 없다. 심지어는 수학과 과학조차도 이 쟁점에 준한다. 철학에 있어서는 플라톤과 소피스트, 실재론과 유명론,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과 분석철학 등이 이 쟁점의 양쪽 진영을 차지한다. 전자들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가진 낙관적이고 휴머니즘적인 철학이라면 후자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인 철학이다. 후자는 단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인식만을 지식으로 간주한다. 

예술사에서의 환각주의는 전자와 맺어진다. 물론 모든 전자의 이념이 환각주의를 불러들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전자는 환각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을 구성한다. 중세의 실재론은 오거스틴에서 보에티우스,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는 주도적이고 긴 계보를 가진다. 이 철학자들은 모두 인간 이성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내내 회화는 정면성의 원리를 따랐다. 이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존재와 역량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거기에 독자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 이성은 신의 이성에 종속된 것이었다. 오거스틴은 인간의 올바른 지식은 오로지 신의 빛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219쪽)



이 책의 요약으로 적절해 보이는 위 인용문에서도 수학과 과학조차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다. 현대 철학, 현대 예술, 현대 물리학이 어떻게 동일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면 놀라울 것이다(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큰 도전이며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저자는 기하학을 이야기하며 예술사와 과학사를 오간다. 철학사의 쟁점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우리 문명을 어떻게 이루어왔는가를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 보여준다.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나왔을 때 그것이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야기한다. 고대의 운동과 근대의 운동은 결정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시대에 운동이란 내부에서 운동의 목적이 있어야 했음을.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은 수학적으로 타당할 진 모르나, 심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테제였음을 완곡하게 설명한다. 



3.

‘세계를 가르는 두 개의 철학과 15가지 쟁점들’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 <<철학의 선택>>은 실재론과 유명론을 오가며 오컴, 흄,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을 지나가며 현대가 마주하고 궁극적으로 취하게 되는 두 가지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보편개념)이 있느냐 없느냐(실재론과 유명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질문이다. 그것으로 시작하여 우리 인간의 모든 사유와 문화, 학문은 큰 줄기를 형성한다. 심지어 우리 개개인의 삶의 방향까지도. 그리고 저자는 그 경향들 사이에 서서 우리에게 자유 의지가 있는지 묻는다. 솔직히 자유의지의 문제는 현대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쌓아가고 있는 요즘 내가 맞닥뜨린 것이기도 하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인 개화는 인과율the law of causality에 있게 된다. 문제는 이 인과율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한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다. 인과관계가 규정하는 법칙에서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인간 역시도 그 법칙에 말려든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증발한다. (247쪽) 



과거-현재-미래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결정된 운동만 존재한다. 현대물리학에서 규정짓는 바, 궁극적인 인과율의 모습이다. 양자역학에서는 그 어떤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는 진짜 아무 것도 결정되지 않음을 증명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진짜였다. 현대 물리학과 현대 예술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이 책의 절정은 키르케고르를 설명하는 부분이었다. 



4.

키르케고르의 개별자, 주체, 절망despair, 단독자, 자유의지는 모두가 같은 말이다. 키르케고르는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오로지 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개별자이다. 그리고 개별자이므로 집단이 아닌 주체이다. 그러나 이 주체임이 절망과 불안의 근원이다. 자신의 고독, 무지, 불안을 잠재워 줄 지적 목적과 위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 이성이 전부라는 전통적인 전제에서라면 이제 인간은 무상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되었다. 이성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와 고결함은 이 죽음을 기반으로 하여 되살아날 수 있다. 스스로를 계속해서 갱신하는 신앙으로 밀어 넣으며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서 은총을 입은 존재가 된다. (275쪽 ~ 276쪽) 



철학을 공부하든, 예술작품을 보며 감동을 받든, 아름다운 여인과 사랑을 나누든, 우리 앞에 놓인 이 불확실하고 목적 없는 일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20세기의 실존주의자들은 과감하게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저자는 보편개념이 존재하고 이성이라는 것을 신뢰하는 어떤 철학들과 보편개념은 이름 뿐이고 이성은 믿을 수 없으며 심지어 '우리 언어의 괴상망측함the awkwardness of our language'라고 하며 인과율(기하학)은 일종의 관습(습관)이라고 보는 어떤 철학들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묻는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재의 사건에서 그와는 전적으로 다른 상황에 있는 미래의 사건을 추론할 수는 없다. 인과율(과학)에 대한 믿음은 곧 미신이다.” - 비트겐슈타인 



결국 우리도 어떤 선택을 한다. 적어도 제대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우리가 왜 태어났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인지 물었던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는, 우리는, 너무 쉽게 절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공감하는 그 순간. 


그러나 이 절망이란 바로 실존주의자들이 부딪혔던 그 절망이며, 키르케고르가 이야기했던 그 절망이다. 윌리엄 오캄은 그것을 절망이라 하지 않았고 신앙이라 믿었다. 흄은 그것을 절망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경멸하며 솔직하게 살라고 강변했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다. 적어도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진 않을 테니 말이다.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경험하며 살 수는 없다. 만약 우리가 영원을 시간의 영속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의 소멸이라고 간주한다면 영원은 당연히 오늘을 사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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