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시민 불복종 (합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이종인 옮김, 허버트 웬델 글리슨 사진 / 현대지성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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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낙담을 칭송하는 글은 쓰지 않을 생각이다. 이른 아침, 자기 횃대 위에 서서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수탉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랑스럽게 펼쳐놓을 것이다. 아직 잠들어 있는 내 이웃을 깨우기 위해서라도.

나는 생필품이라는 단어를 이런 뜻으로 사용한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으로 얻은 것, 처음부터 혹은 아주 오랜 사용을 거쳐 인간 생활에 너무 소중하게 된 것. 이렇게 볼 때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필수품은 음식이다.

<월든>의 첫 번째 장 중에서

이럴 때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한 길지 않은 위인전을 읽어본 적이 있다. 아나키스트적이면서도 이불 속에 숨겨져 있는 송곳같이 독특한 방식으로 짜여진 세상을 거부하는 듯 했던 소로의 이야기를 읽고 원문 <월든> 서적은 너무 읽기엔 어려웠던 나이였기에 <어린이를 위한 월든> 책을 가볍게나마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후 나중에 크게 되면 한 번쯤은 제대로 <월든, 시민 불복종>을 읽어 보기로 하자고 다짐하였는데 그런 와중에 우연히 <월든, 시민 불복종> 서평단이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신청을 하여 서평을 써보게 되었다.

우선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콩코드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자연을 사랑하며 꽃을 좋아했다고 한다. 콩코드의 자연을 사랑한 소로는 어린 시절 첼름스퍼드에서 잠시 산 것, 대학교 4년 동안 케임브리지에서 산 것, 1843년 후반부에 뉴욕 스태이튼 섬에서 몇 달 산 것을 제외한 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콩코드에서 살았을 정도로 자신의 고향을 사랑했다. 16살이라는 최연소의 나이에 하버드에 입학한 후 4년동안 생활하면서 교사, 측량 기사, 목수, 석공, 연필 제조업자 등 수많은 직업들을 거치며 자신이 자연을 연구하는 시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깨달은 소로는 1837년 초월주의 철학자 랄프 월도 에머슨을 만나면서 큰 전환기를 맞았다. 1841년 4월부터 1843년 5월까지 에머슨의 집에서 첫 번째로 집사 노릇을 하였고, 소로가 빙하호 "월든" 호수 옆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다가,애머슨이 유럽 강연을 나가게 될 때 때 집사 노릇을 해달라는 것을 요청받고 1847년 9월부터 1849년 봄까지 다시 집사로 취직해 일하기도 한다.

자연에 관한 글을 쓰는 시인이자 철학자가 되기로 한 소로는 1840년 7월 초월주의자의 동인지 <다이얼>은 소로가 작품을 발표하는 창구가 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힌두교, 불교, 유교 등 동양 사상을 이 잡지에서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월든>에서도 유교 서적이나 힌두 교 서적에서 가져온 문장들로 본인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채워넣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시 생활과 문단 진출을 번번히 실패로 끝났고, 소로는 하버드 동창생인 찰스 스턴스 휠러가 플린츠 호숫가 오두막에서 생활하는 것을 모티브로 하여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2년 2개월동안 월든 호수에서 살았다. 그리고 월든에서의 생활에서 7번의 수정을 거쳐서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고 자신의 철학이 깊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본인의 자서전이 아닌, 실제 소로와는 다른 "나"를 1인칭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월든>이라는 문학 작품이 탄생했다. 그리고 월든 호수에서의 생활 이후, 맥시코 전쟁에 반대하고 있던 소로는 특히 콩코드에서 직접 목격하게 된 흑인 노예 문제에 크게 반발하고 용납할 수 없었고, 이를 계기로 1849년에 쓰여진 것이 "시민 불복종"이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군주이므로 누구도 그에 대한 권리를 시비 걸지 못하리.

("월든" 속 월리엄 쿠퍼의 시 인용)

당신 일을 백 가지, 천 가지로 늘리지 말고 두 세 가지로 단순화하라. 백만 가지 세부 사항을 여섯 가지로 대폭 축소에 그 일의 진행을 손바닥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환하게 파악하라. 문명 생활의 험한 바다에서는 먹구름, 폭풍, 유사, 기타 온갖 것을 고려해야 한다.

(...중략...)

단순화하라, 단순화하라. 먹는 것이 꼭 필요하다면 하루 세 끼가 아니라 한 끼만 먹도록 하라. 백 가지 반찬이 아니라 다섯 가지 반찬으로 충분하고, 다른 것도 비례로 줄이도록 하라.

월든 2장 내가 살았던 곳과 그렇게 살았던 이유 중에서

다른 책들은 1인칭 "나"를 보통 생략하는 것에 비해, 이 책은 전면적으로 1인칭 "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책의 주인공 "나"가 콩코드의 월든 호수에서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바를 냉철하고 신랄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가치관의 대목을 하나하나 살펴서 읽어 가는 데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대명사로 지목되어 있는 "플린트 농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되, 스스로 집을 짓고, 자기가 직접 가꾼 곡식들만을 먹고,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마을에서 다양한 일용 노동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어찌 생각하면 독선적이면서도, 또 어찌 보면 외롭고 고단해 보이는 삶을 있는 그대로 엿보는 듯하였다.

결과적으로 "월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각자 "삶이라는 커다란 실험을 각자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삶을 최대한 단순화하면서 살며, 옷이나 물건과 같은 새로운 물건이나 세상의 무엇이나 누군가에 얽매이기보다는 자기 스스로만을 직접적으로 맞닥뜨리고 받아들이며 나 자신의 삶을 살라고 강조하고 있다. "세상의 평가는 우리가 자신에게 내리는 평가에 비하면 허약한 폭군"이며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지며, 대부분의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체념은 확인된 절망이라고 일갈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지탱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450쪽에 가까운 분량을 넘긴 <월든>의 이야기를 넘기고 나면 약 40페이지에 가까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을 수 있다. 어떤 행보를 보여야 더 존경스러운 정부가 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하며 과반수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양심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 정부가 있을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통렬한 외침을 가슴 깊이 새길 수 있다. 정의롭지 못한 법률이 존재한다면, 그 법을 따르면서 만족하거나 고치고 노력하면서 성공할 때까지 복종하며 대다수 사람들을 설득하며 법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그 법을 위반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강하게 지적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면 세금을 거부하고, 투표를 하면 온 정성을 다하여 제동을 걸고 나서서 투표하라는 당시의 노예제를 반대하는 소로의 절규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듯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도망 노예를 반드시 원주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강제한 도망 노예법을 지지한 메사추세츠 주의원 웹스터에 대한 비판 역시도 내포되어 있다.


만약 우리 자신이 꿈꾸는 방향으로 자신 있게 전진하면서 상상해온 생활을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보통 때엔 예상하지 못했던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가게 될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고 좀 더 자유로운 법이 주위와 내부에 설정되기 시작한다. 아니면 예전의 법이 좀 더 확대되어 한층 자유로운 의미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되고, 우리는 존재의 더 높은 질서에 순응하며 살게 될 것이다. 생활을 단순화하는 비율에 따라 우주의 법도 덜 복잡하게 보일 것이다.

사실 <월든>에 대한 솔직한 필자의 감상을 말하자면 어릴 때는 순수해서 "와! 대단하다. 멋진 도전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현재의 나이의 필자는 어떤 면에선 오히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사실 먼저 들었다. 실제로 소로가 에머슨의 만류에도 도끼 한 자루를 빌려서 지은 월든 호수에 지은 오두막집 터와 인근 주변은 에머슨의 사유지였다. 그렇기에 소로가 진정으로 바랬던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오두막집 생활은 에머슨이 어떠한 세도 걷어가지 않았기에 가능했고, 당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6년간 인두세를 내지 않은 탓에 경찰에 붙잡혀 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나기도 했는데, 이는 고모가 소로의 인두세를 대신 내어주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뒷이야기를 들은 필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어찌 생각해보면 약간의 무책임함마저 필자에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선 어쩌 보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와 동등하게 느껴졌다.

거기에다가 아직은 필자가 어려서 그런지 450페이지에 걸친 <월든> 속 나의 세세한 일대기는 인상적으로 깅거에 남지 않았고, 다만 그 무엇에게도 얽매이지도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찾으라는 메세지 자체는 감명깊게 다가온 듯 하다. 그래서 <월든>의 세부적인 파트는 아무래도 필자가 10년 이상 이후에 나이가 들어서 읽으면 다시 더 읽히는 게 많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땐 필자가 좀 더 원숙해졌길 바라며 말이다.어쩌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뜻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파악하고 곱씹어야 할 책을 필자는 겨우 2주 동안의 짧은 시간동안 틈틈히 읽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니, 그 배움의 얕음과 부족함은 어쩔 수가 없겠다. 법정스님께선 이 책을 읽으시고 "소로는 학생으로써 월든에 갔지만 그 곳을 떠낭로 때는 스승이 되어 있었다."라고 평가할 만큼 좋게 평가하셨는데 이런 걸 생각하면 기한에 쫓겨서 제대로 읽지 못한 필자가 미안해진다.

다만 <시민 불복종>에서 월든이 처절하게 이야기하는 노예제의 부당함과 잘못된 정부에 대한 저항 정신만큼은 정말로 가슴 깊이 박혔다. 특히 마하트마 간디가 이 <시민 불복종>을 읽고 비폭력 운동을 떠올리고 마틴 루터 킹 역시도 시민 불복종 사상을 미국 북부에서 실제로 실천에 옮겼을 정도로 이 <시민 불복종>이라는 문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 역시도 월든 전체를 계속해서 자주 읽기는 어렵겠지만은 <시민 불복종> 만큼은 앞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볼 듯 하다.

그 무엇에게도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소로였지만, 필자는 사람은 반드시 무엇인가에 얽매이기에 더욱 다채로운 삶의 실험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는 물질을, 어떤 이는 명예를, 어떤 이는 권력을.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사랑하고 진심으로 바라는 누군가에게. 필자가 생각하기에 소로의 경우에는 자신의 이상에 그 누구보다 얽매이는 인물이었던 거 같다. 그 이상에 얽매여 타인이 보기엔 무책임하다시피 보일 정도로 치열하게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아갔고, 누군가의 도움을 여차여차 받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말뿐만은 아닌 진정으로 행동하는 운동가였다. 필자는 소로만큼은 자유로울 순 없을지라도, 무슨 맥락으로 필자도 이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자신이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에 얽매인다면 그것을 책임지고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여튼 많은 생각을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소로의 철학책 <월든, 시민 불복종>이었다.

"가장 적게 통치하는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다." 나는 이 좌우명을 진심으로 믿는다. 나는 이 좌우명이 좀 더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실천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을 잘 실천하면 결국 "아예 통치하지 않는 정부가 가장 정부"라는 말이 되는데 나는 이 또한 신봉한다. 사람들은 이런 정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결국에도 이런 정부를 갖는다. 정부는 기껏해야 시민 편의에 봉사하기 위한 조직일 뿐이다. 그러나 대부분 정부는(때때로 모든 정부는) 이런 편의에 그다지 봉사하지 않는다.

시민불복종 첫번째 문단 중에서

이 책은 문화충전200 카페를 통해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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