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 될 때 (100쇄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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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때 - 폴 칼라니티

이 책은 읽기 전 아무런 정보가 없었고, 100쇄 라는 타이틀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책이라면, 읽지는 않았어도 제목 정도는 어느정도 인지하는데도 이 책의 제목은 처음 들었습니다. 얄따란 투명 비닐에 쌓인 책을 봉투에서 꺼낼 때만 해도 몰랐습니다. 전혀.

신경외과 전문의인 저자는 삼십대 후반 폐암을 선고받고 생을 마감한, 이미 고인이 된 분이셨습니다. 최근 12월에 들어서 읽은 책들이 ‘죽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죽음은 죽음인데 저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책들이 주는 메시지는 죽음 그 자체라기 보다 그것을 앞둔 선인? 지성인? 누구나 죽음을 앞에 두지만 쉽게 말하여 질 수 없는 것들을 글로 남겨 준 어른의 말씀들이었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일면 덤덤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나 지금 이 순간에 현존하자 따위로 정리를 하고 책을 다시 꽂아넣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단순한 공감을 넘어 저의 온 몸에 조금의 틈도 없이 철푸덕 달라 붙어 죽음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 죽음이 저의 것이라면, 저의 죽음이라면 저는 괜찮을 수 있을까요? 기어이 친구의 옆자리에 앉아 뜬금없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야 만 오늘을 저는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요.

신경외과, 그가 다른 과 의사였다면 저는 좀 괜찮았을까요? 지금 아이의 머리 속에 있는 자그마한 콩처럼 생긴 그 혹을 제가 몰랐다면 저자의 말들을 다른 책들처럼 그저 먼저 간 지성인의 당부나 조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머릿속 무수한 불순물로 인한 뇌질환 환자들의 이야기를 읽다 말고 책을 덮었습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책을 펴며 떠올린 생각은 저자를 위한, 저자를 향한, 저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에 대한 저의 마음 깊은 애도였습니다.

잘 다듬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죽을 일 없어, 그런 걸 왜 상상해?, 말이 씨가 돼, 상상으로라도 떠올리기 싫어! 그런 생각들을 쓸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죽을 수도 있지, 나보다 먼저 갈 수도 있어, 말이 씨가 되는게 아니고, 계절이 바뀌듯 아침저녁이 다르듯,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그저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 시간을 사는거야, 그 삶의 크기와 길이와 깊이가 다를 뿐이야. 나의 아이가 무조건 살아있어야 하는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매 순간 느끼며 살면 되는거라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지워지며 다시금 깊이 패인 음영이 명징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 삶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두려움으로 지금 나의 삶이 조금씩 깎여가고 있다는 걸 무조건 인정하기로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누구보다 다른 사람의 죽음에 초연했던 의사였던 그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아이를, 그 아이를 이곳에 두고 먼곳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죽음이 아름답다 아니다, 그의 죽음으로 죽음을 이해했다 아니다, 죽음 앞에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따위의 말들이 모두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저는 이 아이와,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 아이와 하루라도 더 살고 싶습니다. 같이 살고 싶습니다.

거울 앞에 선 아이가 묶으려고 손으로 쓸어 담는 머리카락 중 한 두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매일 아침 보고 싶습니다. 실연으로 힘든 아이가 고주망태가 되어 현관 앞 전실에서 잠이 들면 그런 아이를 일으켜 세워 소파에 뉘이고 싶습니다. 면접 전 떨려하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너를 뽑는 건 그 회사가 횡재하는거야!”라는 말을 해주고 싶고, 아이가 첫 월급을 받으면 축하한다는 의미로 고급스런 실크 잠옷을 한 벌 사주고 싶습니다. 아이의 모든 밤과 모든 잠이 부드럽고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의 미래를 누구보다 축하해주고 격려 해주고 싶습니다.

하루라도, 단 하루라도 아이를 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버석거리는 발바닥으로 비척 비척 걸어 나오는 아이의 발걸음 소리를 오랫동안 듣고 싶습니다. 누군가 허락한다면, 정말이지 그럴 수만 있다면 저의 모든 삶과 저의 모든 것을 오롯이 아이에게 줘 아이가 살아갈 수 있다면 열두번도 더 저를 내려놓겠습니다. 부디, 나의 아이가, 저 아이가 하루라도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부디 보살펴 주십시오.




#도서지원 #흐름출판 #책추천 #100쇄리미티드 #책벗뜰 #책사애 #양산독서모임 #기도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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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 편이 되지 못할까 - 타인을 신경 쓰느라 내 감정을 외면해온 당신에게
정우열 지음 / 김영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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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 편이 되지 못할까 - 정우열

육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육아를 하기 전에는 별스럽지 않았던 말이나 행동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거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크는 과정이야’, ‘크면 다 괜찮아’, ‘기다려주면 다 해’같은 것들이죠. 일면 뭐가 문제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아이를 직접 키워보니 더 잘 알겠더라고요. 이런 말이 오가는 대부분의 상황은 크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나 상황이 아닌 경우가 많았고, 기다려 준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방임이나 무력감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해집니다. 바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마찰을 적시 적때에 적법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이야기 하는데 ‘육아’를 운운하는 것이 의외일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일종의 심리서로 이해하고 읽기 시작했는데요. 20여페이지가 채 넘어가기 전 돌연 마음이 바뀝니다. 이 책을 육아서로 정리하기로 합니다. 이유는 바로 책의 전반에 뿌려져 있는 관계, 바로 ‘부모 자식 사이’입니다.

책은 하나의 사례가 소개됩니다. 저자의 정신의학적 관점으로의 해석과 솔루션이 나열된 책이었는데요. 소개된 사례의 8할이 바로 가족내의 문제들이었습니다. 가족내의 문제점을 짚으면서도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가족은 완벽한 타인이며 타인과 나를 분리해야 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는 현재에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스스로를 하나의 객체로, 존재로 새로고침하고 이제부터라도 건강한 시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독립된 인격체로 단단한 토대를 이루는 과업이 사춘기 시절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이것이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쳐 정체돼 있는 것입니다. 자녀를 정체하게 만드는 데 부모의 미해결된 무의식적 갈등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고요. 55

크는 과정이니까, 크면 괜찮으니까 함구하고 경시했던 크고 작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 문제들은 그 시기에 고착되어 숨어 있다가 어른이 된 후에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상황에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긍정적이기만 하지는 않는거지요. 쉽게 내뱉는 말 속에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럼 크기 전에, 다 크기 전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더 컴컴한 그곳으로 숨어들기 전에 수술할 수 있는 부위를 제때에 꼼꼼하게 꿰메 줄 순 없을까?

부정적 감정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당시에는 억누른다고 해도 나중에 다양한 문제 양상으로 나타날 테니까요. 86

이제부터라고 ‘인정’하는 태도와 피하거나 덮어놓지 말고 수면위로 끌어 올려 마주할 용기와 적극적 도움이 필요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봅니다. 스스로에게 친절하세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스스로가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되기 위해 가장 원초적인 감정과 본인의 욕구에 귀 기울여 보세요.

@gimmyoung

#도서지원 #김영사 #나는왜내편이되지못할까 #정우열 #심리서 #육아서 #부모와의관계 #트라우마 #상처치유 #책벗뜰 #책사애24163 #양산독서모임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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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집 -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집이 있는 세상
해비타트 엮음 / 소북소북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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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집 - 한국해비타트

오래 전, 부엌에 딸린 욕실에서 아니 그걸 욕실이라 부를 수 있나? 합판을 덧대어 임시로 만들어 놓은 반평 남짓한 공간인 그 곳에서 커다란 고무 대야에 받아 놓은 물로 얼굴과 손발을 씻었다. 바닥은 거친 시멘트가 다듬어지지 않은 채 무성의한 곡선을 만들어 냈고, 무례하게 기운 바닥 중앙에는 커다란 수챗구멍이 있었다. 그 곳을 욕실이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지칭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그 곳에서 늘 몸을 씻고, 빨래를 했기에 그냥, 욕실이라 부르기로 했다. 변기가 없어 그 무례한 수챗구멍 근처에서 늘 오줌을 누었다. 어떤 날을 꽁꽁 언 대야 물을 길쭉한 바가지로 콩콩 두드려 얼음을 깨뜨렸어야 했고 또 어떤 날은 초록색 타원형의 비누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나 있기도 했다. 그 더럽게 춥고 좁았던 또 더럽게 더러웠던 그곳에서 자그마치 3년을 씻었다. 내 몸뚱이 하나 깨끗하게 해보겠다고.

해비타트의 슬로건은 ’모든 사람에게 안락한 집이 있는 세상‘이다. 이 짧은 문구에서도 한참을 서성인다. ’모든‘이라는 말인지, ’안락한‘이라는 말인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뭔가 말이 안되는 말 같아서 자꾸만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 세상이 있을 수 있나?

작년 이 맘때부터 거의 1년동안 후원하고 있는 단체이다. 후원이래봐야 월 1만원 고작이지만 태어나 처음 후원을 하게 된 단체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독서모임 (나혜림 작가님의 ’클로버‘)이 끝난 직후였다. 가난에 찌부러진 주인공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것이, 그 가난이 무엇인지가 너무나도 크게 다가와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운 날이었다. 독서모임이 끝난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해비타트 조끼를 입은 남자분이 책벗뜰로 들어와 후원서를 내밀었다. 그때 그 분이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먹는 거, 입는 거 다 중요하지요. 근데요. 집이 있어야 돼요. 위험하지 않게, 따뜻하게 편하게 쉴 수 있는 집이 사실은 제일 필요한 거예요.“

그 말을 전하던 분의 얼굴과 그 순간 내가 느꼈던,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강렬한 무언가는 여전히 생생하게 가슴 속에 남아있다. 집이 갖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단순히 지붕이 있는 곳? 잠을 잘 수 있는 곳? 편히 쉴 수 있는 곳?

이 책을 읽으며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 새롭게 정의내려볼 수 있었다. 책은 한국해비타트 팀장을 비롯 사무국장과 매니저들과 자원봉사자의 입을 통해 단체에서 실제 이뤄지고 있는 다양한 사업과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개되어 있다. 집이 집으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는 그들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공간의 의미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집은 그냥 집이어서는 아니된다.

오래 전 그 집에서, 그 욕실에서 나는 어떤 것들을 떠올렸었나. 그때 내가, 나따위가 무슨 꿈이라도 꿀 수 있었나. 그저 그 더럽고 냄새나는 공간을 벗어나고만 싶었을 뿐. 바람이 좀 덜 들어오는, 얼음물이 아닌 따뜻한 물이 조금 있는, 쥐가 파먹은 비누를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에 굴려 머리를 감아야 하는 그런 일들만은 피하고 싶은. 구덩이같던 수챗구멍이 그냥 조금 덜 무서웠으면 했던 정말이지 작고 작은 바람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집은 그냥 집이어서는 안된다. ’안락한‘집이어야 한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집 말이다.

@habitatkorea

#도서지원 #한국해비타트 #후원 #집 #안녕집 #책추천 #책사애24158 #책벗뜰 #양산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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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헤르만 헤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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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 헤르만 헤세



얼마 전 아이와 대중목욕탕에 갔다. 목욕이 목적은 아니었다. 바데풀이라 해서 100센티미터가량 깊이의 풀에서 헤엄을 치기 위한 목적이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곧장 바데풀로 향하는 아이는 스노클링 마스크를 쓴다. 아이가 가고 나서 느긋하게 앉아 꼼꼼히 몸을 씻었다. 온탕으로 걸어가는데 바데풀 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순간, 뜨겁고도 차가운 전율이 정수리에 꽂히더니 이내 목덜미와 허리를 거쳐 발바닥 아래로 내리훑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살아오면서 몇 번 느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전율이었다. 아이가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만큼 물속에서의 자태가 자유로웠다는 뜻이다. 물속이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에 어떠한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의 움직임에 따라 곳곳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물거품들을 바라보노라니 그간 내 삶 속에 잡혀 있었던 어떤 옥죔 들이 물거품처럼 퐁퐁 터지는 것 같았다.



인간은 수많은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아픔, 다른 사람의 판단, 자기 자신의 마음, 잠드는 것과 깨어나는 것, 혼자 있는 것, 추위, 광기, 죽음에 대해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가면에 불과하다. 실제로 사람이 두려움을 갖는 대상은 한 가지뿐이다. 몸을 내던지는 것,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 안전했던 모든 것을 뿌리치고 훌쩍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진 경험이 있는 사람, 그렇게 큰 믿음을 경험하고 운명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은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146p



‘몸을 던진‘ 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단순히 물이 무섭다, 숨을 못 쉬게 될까 무섭다, 코나 귀에 물이 들어가 고통스러울까 겁난다 등 물속에 들어가면 안 될 이유들을 부단히도 들먹였다. 그러나 정작 내가 두려워했던 건 물이 아니었다. 물속으로 뛰어듬, 그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물속에 뛰어든 아이는 물고기처럼 움직였다. 수영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물속에서 숨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태초부터 물고기였던 것처럼 몸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는 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그 장면은 지난 나의 삶을 전혀 다른 각도로 조명했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실제의 그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종의 허상 같은 위험이었던 것이다. 허상. 최근 삶을 둘러싼 대부분의 현상과 관념에 널찍하게 도포된 허상을 시나브로 깨닫는다. 그럴 것이다, 그러지 않을까? 그랬을 가야 등 막연하거나 무지한 것들에 아무렇게나 입혀지는 편파적 사고들이 실제적 시각과 감각을 옥죄었던 것이다.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건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 행복 같은 것들이 아니다. 고통과 슬픔, 비관과 두려움이 함께 있어야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고통을 잘 이겨내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산 것이라는 말과 같다. 67‘는 헤세의 말에서 고통과 비탄, 슬픔과 괴로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은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어렴풋 알게 된다.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고, 몸이 제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그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야 그 속에서 나아갈 방향과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은 수영을 할 수 있냐 아니냐의 말과는 전연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수영은 못하지만 헤엄을 칠 수 있는 건 최선과 차선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자신만의 방법을 어떻게로든 행하고 움직이는 것. 그것은 아홉 살 아이의 물놀이가 나에게 던져준 조그만 돌멩이가 되어 잔잔하고 안전하기만 했던 나의 마음속 호수에 커다란 포말을 일으켰다.



그렇게 이런저런 책을 읽는 동안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영원한 수수께끼와도 같은 문제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헤쳐나가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문제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단지 체험할 뿐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 우리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다시 시도해 볼 수 있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을 새로운 욕구와 열의로 추진할 수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되돌려 놓는다. 264p



최근 읽고 있는 책들이 어떤 구를 이루는 느낌이 많이 든다. 그 끝에서 무엇을 마주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결국 구 안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시도하고, 추진할 수 있는 욕구와 열의를 다지기 위해 부지런히 읽고 쓰겠다.


@moonchusa
#도서지원 #헤세단 #문예춘추사 #에세이 #헤르만헤세 #필사 #책추천 #책벗뜰 #양산독서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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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임파서블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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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임파서블 - 매트 헤이그


모든 일의 불가능한 면을 받아들이렴. 464

오래전 박완서 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굉장히 큰 아픔에 몸서리쳤다. 결혼을 하기도 전 미리 조우한 ‘참척’이라는 말은, 단순한 ‘죽음’ 그 이상일 것이라는 아득한 사실을 책으로 마주한 것이다. 이후 나의 아이를 만난 후 나는 매 순간 ‘죽음’이라는 것에서 그것도 ‘참척’이라는 죽음의 예시 앞에 매 순간 온몸으로 울부짖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의 나를 마주한다. 그 속에서 만나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여성이며, 어떤 엄마인가. 이 책 <라이프 임파서블>이 단순한 소설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나에게는.

일흔의 그레이스는 은퇴한 수학선생님이다. 일찍이 아들이 죽고 무미건조한 삶을 억지로 살아가며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끝내 당면한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에게 삶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던져진 제안은 단순한 집 한 채가 아니라 거대한 장막을 두른 하나의 세계였다. 그 세계를 마주하기 위해 떠난 이비사 섬. 그곳에서 그레이스는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

크리스티나가 했던 말이 계속 떠올랐다. ‘살아 있음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끼고 나면 다른 생명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거든요.’ 내 안의 변화를 부인해 봐야 소용없었다.... 움직이는 우주에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 불가능하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날 보호할 수는 없다. ... 진정한 보호는 항상 타인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능동적으로 베푸는 것이다. 300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런 고통 속에서 일탈로 저지른 부정. 자괴감 속에, 삶의 의미는커녕 살아 있음을 느낄 새도, 느끼기도 싫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내던진 그녀에게 이비사 섬과 크리스티나의 존재는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된 것 이상으로 우주 속의 그녀의 본연을 세심하게 조명한다. 책은 전작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상상 속으로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었고, 사향지의 향을 맡으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실제와 꿈, 꿈이 아니라면 환상이나 상상 속에서 충분히 그것들과 조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것을 어떤 자세와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지는 스스로가 ‘선택’할 문제이다. 그 선택에 어떠한 것도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기를. 스스로 하는 모든 행동은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이에게도 다음의 일은 일면 당연스레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일들에 가능성을 점 치기보다는 (살아야 하나 살지 말아야 하나) 살아 있음, 그 자체에 촉각을 곤두세워 ‘다른 생명’ (물론 스스로를 포함하라)을 지켜내기 위해 행동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출판사 서평단 50번째 위원단으로 선정되어 (제가 50번째로 운 좋게 선정되었다는 의미가 맞겠지요?) 받게 된 <라이프 임파서블>을 다 읽고 나니 키트에 동봉된 캡과 오렌지 쥬스, 항공 티켓, 사향지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섬세한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어 무척이나 영광이었습니다. ‘매트 헤이그’라는 명성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 책은 전작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보다 더욱더 의미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에 꽤 많은 부분 연필로 체크를 했습니다. 줄을 그은 여러 부분들을 다시금 톺아보며 조금 더 이시바 섬에 머물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influential_book


#도서지원 #인플루엔셜 #매트헤이그 #라이프임파서블 #장편소설 #소설추천 #치유 #삶의의미 #책사애24155 #책벗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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