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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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타츠루의 역저 「하류지향」(2013, 민들레)은 일본 사회의 교육과 배움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현상을 말하는 것 같으나 훌륭하게 그 본질을 살피고 분석한 책이다. 일본이라는 사회를 교육의 관점에서, 인류의 문화사적 관점에서, 개인의 심리적 관점에서 깊이 천착한 통찰이 놀랍다. 2007년 출판되었으나 읽히지 않았는지 절판되었다가 다시 출판된 것이다. 그간의 몇 년이, 이 책이 독자로부터 복권되도록 한국사회에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일본보다 20여 년 정도 느린 한국사회의 교육현장에서는 소중한 지침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 내용은 연구회의 모임에서 발제할 것으로, 텍스트의 내용을 요약하는 수준에서 정리한 것이다. 책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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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하류지향」이 2005년, ‘공부하지 않는 아이들과 일하지 않는 청년들’을 주제로 일본에서 행해진 강연내용임을 밝히고 있다. <글로벌자본주의> 원리와 <국민국가> 원리 사이의 주도권 다툼을 논하면서, 글로벌자본주의의 기업이 “선택과 집중, 세계 표준, 글로벌 법칙, 소수의 성공자, 단기 적합과 장기 부적합” 등의 시장 원리로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극단적인 비유를 인용해 보면,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을 경우 육아와 교육에 드는 비용이 절약되고 부부의 자유가 신장되어 사회적 경쟁에서 단기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 자체의 소멸을 불러올 수 있듯이, 기업이 고용 조건을 열악하게 만들면 비용 절감과 국제경쟁력에서 유리하나 노동자의 구매력이 떨어져 결국 언젠가는 시장 그 자체가 소멸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배움과 노동으로부터 아이들이 멀어지고 있는 현상이 규모와 심각성에서 차이가 날지 모르나 세계 모든 선진 국가의 공통된 현상이라 하는 점에서 ‘도피’에 대한 논의는 출발하는 듯하다. 아이의 게으름이나 교육방법의 문제로 ‘공부로부터, 혹은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노동의 권리와 의무를 버리면서부터 개인도 그 권리를 포기하고 의무를 벗어던지는 사회사적·심리적 선택의 행위로 귀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여기서 인용되는 것은 적절하다.

 

공부로부터의 도피 - 등가교환 사회의 귀결, 어린 소비주체의 분투

 

  현실은 열악하다. “공부를 혐오하는 아이들 → 맞춤법을 모르며 모르는 것을 개의치 않는 아이들 → 세계와 현실을 구멍 뚫린 상태로 인식하며 불편해하지 않고 살아가는 아이들 → 불량스러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아이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가기 전에, ‘스와 테츠지’의 통찰을 인용하면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학교가 오늘날의 사회를 가르치고자 ‘생활주체’나 ‘노동주체’로서의 자립을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아이들은 어엿한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인 주체인데 학교에 들어가면 새삼스레 교육의 ‘객체’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 입장에서 내키지 않는 일일 것이다.(49쪽)

 

  불편함을 모르고, 부족함이 없는 아이들은 가사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길들여진다. 오로지 돈의 투명성과 전능성을 경험하며 어엿한 한 사람의 선수로 시장에 참가한다. 가치와 유용성을 유일한 판단의 기준이라 생각하는 소비주체로 성장한다. 가정에서, 현대의 샐러리맨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아이들은 불편함을 견디는 대가를 보고 배우면서 등가교환을 체득한다. 학교도 어린 소비주체에게는 흥정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은 배움의 가치와 유용성에 대해서 묻는다. 아이들의 질문은 모국어를 배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특히 교육이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심지어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도 알 수 없는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을 학생들이 등가교환(갇힌 공간, 편의점을 상상해 보라)의 방법으로 얻는 것이란 불가능하며 계량하기도 힘들다. 등가교환은 공간모델이면서 무시간 개념이다. 배움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으나 시장 경제와 등가교환의 원리는 최근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길들여버렸다. 등가교환의 현장에 선 아이들은 소비주체로서 변해서도 안 되고 가치관을 바꿔서도 안 되는, 시장의 금기사항과 규칙에 복종하면서 그 흐름과 힘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한다. 그 저항의 일부가, ‘백화점 전문 클레이머’와 다름없는 ‘교실 클레이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안 하기’는 가장 성실하게, 가장 근면하게 세상을 사는 힘이 된다.

  더러 ‘자기 찾기, 나를 찾는 여행’의 방식 등을 통해 개인은 내면을 탐구하면서 개별적 흥미와 관심을 소중하게 여긴다.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는 가치라고 하더라도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 유용성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포기한다. 자기중심적 가치매기기가 그 원인이다. 그러므로 학생들을 교육 소비자로, 소비 주체로 인정하면 배울 거리(교육과정)의 의미와 가치를 결정하는 권리도 아이들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그 손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측량할 수 있다고 믿는, 이를테면 30센티미터 자가 들려 있다. 최근의 수요자중심교육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지점이다.

 

리스크 사회의 약자들 - 도피의 다른 이름 고립, 하류를 긍정하다.

 

  사막 상인들의 긴 대열에서 무리의 속도를 결정짓는 것은 가장 느린 낙타라는 말이 있다. 상인의 입장에서는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힘든 사막의 힘든 길 위에서 채찍을 무리하게 가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현대 국가의 관리자는 사막의 상인과 같지 않다. 저자는 일본에서 호송선단방식은 끝났다고 말한다.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먹힌다. 이것이 세계화이며, 시대적 공평성이다. 필요하면 구조개혁을 한다. 모든 것은 집단에서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결정이며 자기책임이다. 능력주의다. 야마다 마사히로의 “리스크”와 “양극화”가 여기에서 등장한다.

  양극화는 필연이다. 작은 투입의 차이가 거대한 산출 차이를 낳는다. 계층별로 학력에 대한 신뢰의 차이, 노력에 대한 동기부여의 차이가 크다. 공부해도 필요 없다고 공언하는 계층의 부모는 자신의 노력부족으로 낮은 계층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부모의 아이들은 노력이 보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노력할 동기를 잃어간다. 이러한 피더백이 아주 짧은 시간 일본 사회를 계층화 한 원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능력주의는 공정함을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현대의 능력주의는 이기고 있는 사람이 계속 이기는 것을 정당화하는 시스템이다. 리스크 헤지는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다. 사회 상층부는 효과적으로 리스크 헤지를 하고 있다. 무수한 후원자, 전관예우, 관료들의 공기업 낙하산 등 그 상부상조의 연대 축은 강력하다. 그러나 하층은 전혀 헤지가 되어있지 않다. 하층에게는 소위 ‘자기결정․자기책임’이 강조되는데, 이는 벌거벗은 개인이 고립무원인 사회에 맞서는 방식이며,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죽음의 방식이다. 고립되고, 병적인 형태가 된다. ‘공부로부터의 도피’도 고립의 초기 증상일 수 있다.

 

  고립된 아이가 혼자서 학교라는 시스템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자기 가치관을 학교 시스템에 대등한 것으로 대치시킨다. “이것을 왜 배워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들이댄다. 스스로 배울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면 아이는 배움을 거부한다. 이것이 자기결정이다. 배우지 않음으로써 초래되는 리스크를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이렇게 아이들은 계층 하강의 리스크를 순순히 받아들인다.(115쪽)

 

  계층 하강을 자기결정에 대한 책임으로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은 나름의 만족감과 높은 자기평가를 내린다. 미래보다 지금을 즐기는 방식으로 자신감을 획득하게 되는 이러한 사고의 방식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지배적 가치관에 동조하고 순응하면서 계층은 급속도로 폐쇄적으로 변화한다. 적극적으로 문화자본을 거부하고, 나쁜 성적이 인간의 가치를 높인다는 반학교 신화. 학습포기와 공부로부터의 도피가 나태와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자신감을 높이고 자기를 긍정하는 기술을 익힌, 적극적 노력의 결과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커지는 것이다.

 

노동으로부터의 도피 - 변화와 성장을 거부하는 소비주체의 욕망과 무지

 

  자기결정은 자존감을 고양시킨다. 잘못된 선택지가 초래하는 심신의 손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유용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자기결정이 국가의 정책으로 권장되고 이데올로기로 아이들에게 타율적으로 주입되고 있다고 한다.

 

  “모두가 자기결정을 하는 시대이니 너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결정하라”고 명령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을 보통의 지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알아챌 텐데 아이들은 (어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선택을 강제하면서 선택한 것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조리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특별히 부조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가 현실에 있고, 일정 정도 이상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부조리로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128쪽)

 

  이러한 현실과 맥락에서 일본형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가 태아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노동을 하고 낮은 임금을 받는 ‘불쾌함’보다, 노동하지 않고 부모의 잔소리를 듣고 주위 사람의 눈치를 보는 정도의 ‘불쾌함’이 더 경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니트라는 삶을 선택한다.) 일본형 니트는 약자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기 위해 자기 의사로 지식과 기술을 익힐 기회를 거부하고 자진해서 차별적 구조를 강화하는 데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회의 제한에서 비롯되어 계층화의 증상이라 말해지는 유럽의 니트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다른 것이다.

  일본의 학생들은 교육을 권리가 아니라 의무로 생각하며, 고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배움으로부터의 도피를 성취감이나 자기만족으로 여기고 있다. 도착은 이렇게 설명된다.

 

  “교육의 ‘권리’를 ‘의무’로 바꿔서 읽는 도착 행위가 일어나는 이유는 경제적 합리성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숙의 최초 단계에서 자신을 ‘소비주체’로 내세우게 된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단순히 생활이 풍족해졌다거나 물질적 욕망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의 문제로, 아이들이 ‘시간’과 ‘변화’에 대해 스스로를 가두듯이 어릴 적에 자기 형성을 이미 완료해버렸기 때문이다.(133쪽)

 

  직장인들은 이직을 반복하면서 ‘파랑새’를 찾아 ‘여기와는 다른 장소’를 찾아 헤매면서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할 것’을 거부하는 동안 도저히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곤궁한 상황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니트 역시 기대보다 낮은 임금, 보잘 것 없는 노동윤리, 불확실한 등가교환 등의 인식 속에서 형성된다.

  환금성이 빠른 실용학문을 지향하고 실러버스(직무기술서)가 강의 전에 무시간 모델로 제공된다. 교육을 ‘고역과 성과’, ‘화폐와 상품’, ‘투자와 회수’라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보며 소비주체는 변화하기를 거부한다. 변화와 성숙을 금지당하고, 공부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며 자신의 무지에 고착하는 욕망이 배움 속에 깃들게 된다. 시간의 흐름과인간의 변화, 자질의 향상과 성장, 노동과 인식의 변화, 교육은 이러한 개념을 두루 포함하지만 아이들도, 졸업생을 맞이하는 사회도 배움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어떻게 도울 것인가 - 소제목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다.

 

미국식 모델의 종언 - 무시간 모델과 합리성의 종언, 교환을 통해 우회적으로 실현되는 것에 주목하고 신뢰관계와 다양한 인간적 가치창출에 관심을 가지먀 전통적 노동관을 회복해야 한다.

자식이라는 ‘제품’을 속성재배하려는 부모 - 육아를 등가교환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 버려야 한다. 사춘기의 메시지를 제품의 소음쯤으로 생각하지 말라.

배움, 소음을 신호로 변환하기 - 커뮤니케이션은 시간적 현상이다. 미래까지 가지 않으면 과거를 확정할 수 없고, 과거가 확정되지 않으면 미래는 성립하지 않는다. 경외심과 인내심을 가지고 조용히 귀 기울이라. 제품은 노래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노래한다.

결코 세계화 될 수 없는 영역 - 무시간 모델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사회의 기반이 되는 일은 아득할 정도로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사제관계의 조건 - 스승의 조건은, 그 스승 또한 누군가의 제자였다는 점이다. 스승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하면 성장은 멈추고 문은 닫힌다. 자기완결의 오류다.

교육자에게 필요한 조건 - 스승을 가져라.

누군가를 존경한다는 것 - 무한한 존경은 사제관계의 본질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행동을 뒤에 올 세대가 모방한다.

항의하러 달려오는 부모 - 교사 집단은 균질성이 높다. 먼저 사과하라.

문화자본과 계층화 - 문화자본은 교양이다. 소속계층을 표시하는 문화자본이 명함을 대신한다. 문화자본이 사회계층의 기호화되고 있다. 문화자본을 갖추라.

가족과 새로운 친밀권 - 해외에서 결혼식 하는 사람, 장례식에 아이를 데려가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상호부조의 네트워크를 가져라. 고립되면 약자가 된다.

니트의 미래 - 니트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다. 사회문화적 존재다.

우리가 니트를 책임져야 하는 까닭 - 니트는 가정문제가 아니다.

주제넘은 커뮤니케이션이 사람을 키운다 - 피부로 느끼고 삶의 밑바닥을 보아야 한다.

균질성과 다양성 - 일본의 니트는 균질성의 산물이다. 균질성을 직시해야 한다.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 - 듣고 싶은 것만 듣지 말라. 거짓의 전제를 넘어라.(이를테면 수업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물어보라.)

시간성의 회복 - 도시화와 근대화는 시간성을 잃어버리도록 했다. 등가교환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다. 다시, 저녁에 비가 오면 아이들은 우산을 들고 역에 아버지를 마중 나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다.

신체성의 교육 - 내가 이 광대한 우주의 다른 곳도 아닌 여기에, 바로 이 순간에, 바로 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 ‘무언가 위대한 존재’의 뜻을 감지할 수 있으면 인간은 아주 풍요롭고 여유로운 마음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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