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에 깃들다 - 학교를 떠나 산골로 들어간 어느 선생님의 귀촌일기
박계해 지음 / 민들레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빈집에 깃든 영혼의 일기

나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할아버지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고 말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여기니, 선산이 있고 아직 논밭이 흩어져 있으니 농사를 짓는 것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셨다. 할아버지는 일제 때 영천의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서 오래 근무하였으나 그 생활을 버리고 농사를 지으신 분이었다. 나는 그때 새겨듣지 않았었다. 도시에서 정착하고 교직을 시작하고 정신없이 달려왔으나 나는 늘 마음이 무겁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 Hodge)가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을 서로서로에게서, 그리고 땅으로부터 유리시켰고, 그들을 세계경제라는 사다리의 제일 아래 칸에 자리 잡게 하였다.”고 한 것처럼 나는 대학을 마치고 고향을 버렸고 땅을 버렸고 도시의 계층사다리에서 조금 더 위에 기어오르려 발버둥을 쳐왔다.  

직장에서는, 몇 되지 않는 저 아이들을 붙잡고 매일 나의 생계를 호소하는 수없는 교사들, 나도 그 속에 있다. 우리들의 호소는 가끔 거룩한 사명의식 같은 것으로 포장되지만 그것이 공공연해질수록 교사의 자위는 뻔뻔해진다는 것을 나는 깨달을 때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와 이 질서와 구조가 영원하리라 예상하며 이곳에서 버틸 것을 바란다. 가끔은 내 삶이, 혹은 내 자식들의 삶이 ‘지금 여기’에서보다 조금 나아지리라는 희망으로 숱한 거짓을 양산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짓뭉개고 들까불면서, 오래 마음 아파오며 오래 헐벗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이 나쁜 짓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늘 교문 앞에서 교실 앞에서 나는 부끄럽다.

리 호이나키(Lee Hoinacki)는 ‘헤나시’의 사상과 삶을 논하면서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을 말한 적이 있다.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혁명’이다. (…) 자기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전통은 살아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거룩한 바보들’이 아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들의 연기(演技) 때문에 우리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고 하였었다. 우리 주위는 너무 많은 천재와 너무 많은 교양들이 범람한다. 아무도 거룩해지려 하지 않고, 바보가 되려하지 않은 요즘이다. 그러므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거룩한 바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아름다운 책을 읽었다. 박계해의 귀촌일기, <빈집에 깃들다>(민들레)를 읽었다. 열여덟 해의 교직을 버리고 귀농하여 그녀의 남편 승희 씨와 빈집에 살면서 기록한 귀농 이야기다. 문경 가은의 모래실, 그곳 사람들의 애환을 따뜻한 시선으로 들려주는 그녀는 바보 같으며 거룩한,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스토리텔러이다. 그녀가 책을 닫으며 “기록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마찬가지다.”하고 돋을새김해 둔 버지니아 울프의 언명은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적확한 말로 유효함을 보여준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수많은 이웃들이 등장한다. “주인집 형수 아주머니, 아들 진수 씨, 봄이 아빠, 덕배 씨, 진호 씨, 윤영권 어른, 발발이 아주머니, 오동나무집 아주머니, 홀쭉이 할아버지, 콩산 할머니, 의성이 아빠, 치실 할머니, 홍문정 이장님, 순순이 아주머니, 샘물 할머니와 영분 할머니, 서울 할머니, 갑구 씨, 그 어머니와 아내 미뚱, 치실 할머니, 새벽 아빠, 대나무집 아주머니, 막달레나, 베드로 씨, 미스 광, 영분 할머니, 길 건너 할머니, 욱이네, 이장댁, 단감나무댁 아주머니, 범이 엄마 ….” 사람들은 하늘의 별만큼 많으시다.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는 “온순한 개들과 무심한 듯 여물을 씹는 외양간의 소들, 장닭과 토끼, 원앙, 도마뱀, 낭만새, 콩새와 불나방, 나무와 풀과 별들 ….”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이웃이어서 삶의 일부이며, 전부이다. 그러므로 빈집에 깃든 이야기는 이웃과 살아가는 사람 사는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모래실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읽으며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웠었다. 발발이 아주머니가 토란을 까며, 벌기만 하고 써보지도 못하고 간 남편에 대한 서러움으로 울먹일 때, 꼿꼿하려고 애를 쓰며 걸으셨으나 혼절하여 끝내 돌아오지 못한 샘물 할머니, 욱이네의 상에 얼굴을 비추지 못하였던 이장댁의 눈에 담긴 그 쓸쓸함들… 전깃줄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는 ‘낭만새’, 아홉 마리 새끼를 낳고 스스로를 건사해 낸 돌순이의 삶도 인간의 그것보다 뒤지지 않는 치열함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그윽하게 보아 온 까닭이다. 기록하지 않았으면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눈시울을 붉힌 것만이 아니다. 그 속에 깃든 삶의 지혜란 또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를테면, “원래 돌밭에는 뭐든 잘 돼. 돌이 말이지 오줌을 싼대, 그러니 거름이 좋겠지?”라는 서울 할머니의 말은 웅숭깊은 승희 씨에 의해서 완벽하게 해석되어 우리에게 전달된다. “돌이 습기를 머금고 있다가 필요할 때 수분을 조금씩 내주는 거겠지.”도토리나무가 들판의 벼들을 굽어보고 있다가 흉년에는 구휼을 해야 하니 도토리를 많이 단다고 한 새벽 아빠의 말은 경이로운 것이다. 도토리 나무의 마음이 그러한지 알 수 없으나 세상과 자연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새벽 아빠, 그의 삶에 예수님의 향기가 깃든 까닭이 아니겠는가.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그러한 시선이 아니다.

귀농한 사람들이 마을 사람들의 주종관계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샘물할머니 댁으로 겨울 땔감을 해 나르는 봄이 아빠와 승희 씨는 분명히 우리 눈에는 바보들이다. 그 바보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는 가슴 뭉클한 그 무엇이 된다. 그러나 늘 아름다운 이야기만 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귀농한 사람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있기 마련이어서 ‘편리함과 속도와 관습에 대한 집착’은 괴로운 것이다. “늙은 풀이 잘 안 죽는다”고 투덜대는 노인의 말은 오래된 반어이며 역설이다. 반복해서 “마당의 풀”로 상징되는 집착과 또 다른 집착의 견고함, 나는 그녀가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많이 나아가기를 원하며 책을 읽었었다. ‘인간에 의해 버려진, 버려도 버려도 제 살붙이가 누구인가를 묻는’ 잡초에 대한 그녀의 인용이 지지받기를 기대하였었다.
 

박계해는 통장의 잔고로 말해지는 궁핍과 불안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내비둬, 다 알아서 해.”로 일관하는 남편 승희 씨와 달리 혼자 걱정한다. 그녀의 딸 “나라”와 아들 “한이”에 대한 양육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먼 곳에서 자취하는 아이들 집 문을 닫으면서, 작은 상자 속에 아이들을 담아 뚜껑을 꼭 닫는 느낌에 마음이 아팠다고 하는 이 괴로움은, 그녀의 자녀관이 우리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를테면 그녀가 눈 내린 산길에 찍힌 산짐승의 흔적을 보며 “너희들처럼, 걸친 것 없이, 쌓아 둔 것 없이도 언제나 자유롭기를….”이라 한 것은 특별한 것이다. “장롱도 없이 흙이 흘러내리는 바람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점점 눈을 감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모습은 자발적 가난에 닿아있는, 성속의 경계에 서 있는 인간의 성찰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나는 원한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저 기도들을 누군가 경청하기를 소망한다.

살아온 것을 버리지 않고 어린것들과의 연극이나, 혹은 노인 대학으로 열린 그 영혼의 겸허함을 나는 본다. 단정함을 만난다. 그녀와 함께 ‘작은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시 생각해 본다. 그 어딘가에서 “누구나 꽃”이 피어나길 기대한다.

어느 새벽, 그녀의 깨달음을 들어보자.    

   
  어쩌면 우린, 매일 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 태어나고 죽는. 윤회란 이미 우리의 일상에서 보여지고 있으며, 진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음을 잊고 찾아 헤매다 한 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윤회를 살고 있는가. 직장에서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만나고, 하루하루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고, 몇 년 후에는 다시 이별하고 … 언젠가 이것마저 끝날 테이지만 나는 이것이 내 삶의 전부라 믿고 싶지 않을 뿐, 나는 늘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내 떠나는 그 자리에 누군가는 다시 와서 또 나의 지루한 삶을 반복할 터이니 개별의 나는 다르나 우주의 눈으로 보면, 저 단순한 우주의 눈으로 보면, 첫 새벽의 눈으로 보면 얼마나 우리들의 삶의 윤회는 얼마나 깊은 것이며, 또 절실한 것인지. 늘 나에 대한 불만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밖으로 나와서 밥을 벌어먹은 이래로 나는 이 숱한 진실들은 모른 채 여전히 살아간다.

오래 전, 나는 내가 살 아파트를 분양받아 두고, 기초를 다지고 골조와 기둥을 올리는 동안 몇 번이나 그곳을 기웃거렸었다. 입주할 때는 오히려 그 외관과 내부가 낯익은 곳이 되어 있었다. 한때 집의 소유에 관한 나의 간절한 소망이었던 셈인데, “집을 갖지 않겠다”는 그녀의 남편 승희 씨의 선언이나, “두 다리를 마음껏 뻗고 몇 바퀴쯤 데굴데굴 구를 수도 있는 방”을 꿈꾸는 그녀의 소박한 소망은 집 가진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나는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하였다. 왜 빈집의 박계해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시’를 통해 이야기를 받아내지 않았을까. 시적인 이야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였었다. 그리고 E. F. 슈마허가 인용한 구절도 생각하였었다. “우리는 관념 없이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이 관념에 따라 결정된다. 산다는 것은 다른 일 대신에 어떤 일을 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교육이란 “무의미한 비극이나 내면적인 수치, 그 이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관념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스카프에 물들이는 일을 반복하고, 어린것들과 그들의 삶의 진실한 연기(演技)에 생을 열어두고 있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나는 바란다. 시적인 것을 꿈꾸지 않으나 너무나 시적인 저 삶이 계속되기를 나는 바란다.

또 다른 거룩한 바보 박계해를 만나려면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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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새 2011-06-10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한겨레에 댓글남겼는데요....
책에선 없는 뭉클함, 고맙습니다.

영화처럼 2011-06-22 16:26   좋아요 0 | URL
여기에도 오셨네요. 늘 건강하시기를 ...

2011-06-10 1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처럼 2011-06-2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계셨네요. 무탈하시지요.
시인이시니, 좋은 시를 많이 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