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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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테판 에셀의 저작 <분노하라>(돌베개)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이 뜨겁다. 언론에서도 주목하고 있다.(관련기사 - 시민들의 참여야말로 평화롭게 저항하는 노하우) 그는 반나치 레지스탕스 운동가였으며, 세계 인권선언문의 초안 작업에 참여한 외교관이었고,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기까지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흔 네 살의 그는 저항과 진보에 관한 살아있는 전설로 다가오기도 하고, 짧은 진술들이 진실하고 명징하다.  

  그의 이야기는, “불의에 대한 분노, 자기 삶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 무관심을 넘어 현실에 대한 참여, 이웃과 타지에 대한 연민, 비폭력과 평화적 봉기”로 요약된다. 얇은 책 속에 흩어져 있는 그의 문장은 탁월한 성찰이기도 하지만, 일생을 올곧게 살았으며,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현재형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 감동이 더해지는 것인가도 싶다. 사실 우리의 근현대사에 이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가 나와 주변, 나와 이웃, 나와 나의 국가를 성찰해 볼 때 어긋난 것 없이 일치함을 알게 되고, 그래서 놀랍기까지 한 것이다.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 국가에 의한 공공연한 인권의 유린, 폭력적 국가 권력의 홍보매체나 다름없는 언론들 …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목도해 오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이러한 것에 분노하라고 말한다. 관심을 가지고, 선거에 참여하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라고 말한다. 나는 이렇게도 쉽고 분명한 사실을 앞에 놓고 그의 문장을 옮기면서 조금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그의 문장은 훨씬 현실적이고 풍부한 것으로 다가왔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 (…) 자유란 여우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그는 개인에게 분노할 것을 권면한다. 사람들 속에 분노의 동기가 실종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희승은 시 「세상이 달라졌다 」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세상이 달라졌다/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세상이 많이 달라져서/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뜨거운 여름 낮의 한때처럼/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고. 한때의 투사(?)들은 보잘것없는 뼈다귀를 물고 개들처럼 권력의 그늘 속으로 진입하고, 뜨거웠던 저항의 시간들이 고요로 대체되는 역사를 우리는 반복해왔다. 대학을 다닐 때 학내민주화투쟁이니 등록금 인하 투쟁, 혹은 호헌철폐니 독재타도니 하면서 긴 스크럼을 만들고 집회에서 뜨겁게 외쳐대었던 그들은 이제 분노 대신 자족하며 안락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권력의 주변에서, 혹은 직장에서 개과의 여우가 되어 교활하거나 약은 채로 사람들을 닦달하고 있을 터이니…  

  “샤르트르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당신은 개인으로서 책임이 있다’고. (…) 어떤 권력에도, 어떤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인간의 책임. 권력이나 신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참여해야 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원래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찰하며 인간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책임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소유에 관한 욕망과 비겁한 굴종이 지배적 내면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우리는 어떠한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책임으로부터의 자유는 선천적인 것도 아니고 스스로 발굴한 것도 아니다. 세상 속으로 발 들여 놓은 이래로 수많은 경쟁과 갈등 속에서 체득한 삶의 원리이다. 경쟁에서의 승리, 승자의 독식 논리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유전자의 확대재생산이 신자유주의에 가장 적합한 인간형으로 정착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인간관계가 무너지고, 이웃과의 덕목은 사라지고, 오로지 적들이 내 앞에 펼쳐지게 되는데 국가는 이 무수한 경쟁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폐기되어야 할 대상이며 낡은 그 무엇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육(飼育)의 결과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신에게도 굴복할 수 없는, 나를 향한 질주와 이기와 욕망이 들끓을 뿐이다. 광적인 열정이 진정한 신앙을 질식시켜버리듯 자기 안에 갇혀 허우적거릴 뿐이다. 책임이 없다.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무관심으로 살아간다. 오래 전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교사들 중 몇몇은 아주 쉽게(나는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치열하였겠으나 자기 행위가 야기하게 될 어떠한 현상도 예상하지 않은 채) 몸담았던 조직에서 탈퇴해버렸다. 그들 중 누구도 강요에 의해 가입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였는지 유유히 떠났으며, 그것도 무리를 지어 떠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잘 지낸다. 여전히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회식 자리에서 웃고 떠들며 술 마시고 노래한다. 한때 그들이 머물렀던 조직의 현재가 어떠한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해야 했던 과거의 곤궁했던 상태로부터 이미 벗어나 확고하게 기득권을 소유했기 때문에. 그들은 분노할 힘도 잃어 버렸고, 참여의 기회도 잃어버렸다. 사실 분노한 적도 없으며 참여한 적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궁색한 변명이 그들의 우수 근방을 배회할 뿐, 착한 교사도 아니고 나쁜 교사도 아닌 채로 그저 이 무수한 날들을 살아가고 있다. “자기가 모르는, 한 번도 만나보거나 접촉한 적이 없는 이들에 대한 추상적인 사랑은 없다.”고 한다. 영영 기회를 잃어버린 채, 쓸모없는 일에 변죽을 울리면서.  

  “가자 지구, 그곳은 150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이 강요된 모든 결핍 상황에서 그들이 어찌나 지혜롭게 대처하던지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지는 가난과 비극을 목도한다. “최저 임금 4,320원, 상위 20퍼센트가 부의 80퍼센트를 소유”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 반면에 가진 자는 은행을 “사금고”처럼 이용하며 세상은 재벌 삼성의 왕국이 되어 있다. 세상은 창살 높은 감옥이며, 사람들은 여우의 먹잇감이다. 마음대로 해고하고 마음대로 철거하고 마음대로 잡아들이므로 결핍으로 연명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대로 지혜를 발휘할 수밖에, 내핍할 수밖에. 우리에게 슬픔이나 연민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낯설어졌다. 송경동 시인의 “희망버스”는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가. 담을 넘어가는 저 연대의 노래가 목숨 걸고 고공을 버티어 온 이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아름다운 분노의 번짐이다. 

  “샤르트르는 1980년 3월, 임종을 3주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 ‘끔찍한 지금의 세계가 기나긴 역사의 발전 속에서 보면 그저 한순간일 뿐인 이유를, 숱한 혁명과 봉기를 이끈 주도적인 힘의 하나는 언제나 희망이었음을, 내가 미래를 생각하면서 여전히 그래도 미래는 희망이라고 보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세상의 유언은 인간의 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샤르트르의 저 말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만나게 된다. 철학자의 눈으로 꿰뚫은 세계의 기나긴 역사와 우주의 운행 원리는 비폭력이다. 거기에 희망을 걸어 두었다. 스테판 에셀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는 것은, 여전히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일상화다. “폭력을 멈추게 하는 유일한 수단 또한 폭력”이라 한 언명을 샤르트르 스스로 폐기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이 잔인함들 앞에서 맨손으로 맞서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이 “분노하라”고 하는 호소를 낳은 것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분노는 폭력을 부르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니라 분개와 다르고 성냄과도 달라서 폭력을 종식하는 방식이며, 그러므로 그 속에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낙관주의자의 “격렬한 희망”이 걸리게 된다. 진보에 관한 믿음이며 세계에 관한 사랑이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이 늙은 투사의 외침이어서 더 깊게 다가온다. 그의 확신이 오류가 아닐 것이라 믿게 된다. 

  “‘항상 더 많이’라고 외치며 앞으로만 질주하는 태도와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輕視,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분노를 잊은 이유들은 많고 많다. 우리를 길들여 온 삶의 방식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더 많이”와 관련된다. 비교우위에 대한 선망, 속도에 대한 맹신, 소비의 탐닉, 약자에 대한 무시와 잔인한 야만성, 천박함과 무지, 과거의 망각과 현재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같은 것들이 정확하게 작동하는 세상에 우리는 갇혀 있다. 언론의 유착과 왜곡은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삶에 덕지덕지 기생한다.  

  스테판 에셀은 인터뷰에서 ‘시를 읽고 암송하라’고 권한다. 그는 인간의 자기발전가능성을 신뢰한다고 했다. 어느 때 주워들은 ‘마르틴 뇌밀러’의 시를 인용한다. 분노, 혹은 격렬한 희망을 위해.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 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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